우리 논객넷에서 무리하게 선교하는 분이 있어서 갈등이 있는데, 그래도 이 얘기만큼은 해야겠다. 뭐, 선교를 하거나 어느 종교를 선호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겠나 싶기도 하지만.
어제저녁, 도시에서 낙향하여 진부면에서 살고 있는 몇몇 지인들로부터 어느 주민 생일 전야제 겸, 저녁이나 함께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평소 자주들 모이는데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소원했기에 모처럼 함께 시간을 갖자는 청을 거절하는 것도 지나친 것 같아서 약속장소로 나갔다.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마지못해 나간 자리였지만 그래도 만나면 즐겁고 재미있게 마련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화제話題도 넉넉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가오리탕도 정겹다. 무엇보다 내가 모르던 세상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지나치게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깨우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자리에는 관광해설사라는 교육을 받고 월정사에 있다는 무슨 박물관에서 2개월 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사람이 함께 했었다. 일자리마련 차원에서 운영하는 일이라는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해설사로 일하면 강원도, 혹은 평창군에서 급여를 지원한다고 한다. 나이 먹어 노느니 그런 일이라도 얻어걸리면 행운이라던가.
그런데 그 양반, 다시는 절에서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놀면 뭐해? 그 좋은 일 왜 안 한다는 거야?”
“지랄……, 중놈들 등살에 견딜 수 있어야지.”
“스님들이 왜?”
“아무에게나 반말지거리는 다반사요, 사람 알기를 제 놈들이 가르칠 대상으로만 아는 인간들이야. 평생 높은 분들 모시면서 일해 봤지만 중들처럼 오만방자한 인간들, 본적 없어.”
나 역시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산사에서 도를 닦는 스님들이 오만방자하다? 깨우침을 얻은 분들이라 중생들을 보면 당연히 가르치고 싶어서 그런 걸까?
그런 상념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 들려왔다.
“차마 말로 하기는 그렇지만 종교인들이 일반인들보다 더 지저분한 것 같더라고.”
이런 대화를 나누며 나는 사람 사는 세상,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내가 만난 스님들 중에 그렇게 오만방자한 분 별로 보지 못했기에 의문이 생기는 거다.
혹,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직책을 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가.
거룩해보이던 선생님도 먹고 싸는 인간이요, 양귀비도 굶어 살지는 않았을 터이고 깨우쳤다는 스님들도 육신을 지닌 인간일진대, 일국의 대통령일지라도 결국에는 인간임에 선생님이니까, 스님이니까, 대통령이니까, 신부님이니까, 목사님이니까 이래야하고 저래야 한다는 내 기준에서 벗어났을 때, 분노하고 비판하는 건 아닌지 돌이켜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님이든 기독교 성직자든, 인간이 살아가는 드잡이 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고 오해할 만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았던 건 사실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겠노라 깡패들을 동원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스님들이 있는가 하면 희대의 살인자요, 동족상잔의 원흉인 김일성 일가 편을 드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추기경더러 옷 벗으라 난리치는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신부집단이 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심지어는 대통령까지 만들어내고 그로도 부족해서 정당으르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던 개신교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인들이 타락했는가?
내가 보기엔 그건 결코 아니다. 어느 종교에나 진정 깨우침을 추구하는 스님들이 계시고 하느님과 일체되기 위해 오직 수도에 몸 바치는 성직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불교에는 선승禪僧들이 있고 가톨릭에는 수사修士님들이 있다.
개신교에도 이런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분들은 자신의 수도에 매진할 뿐, 세사世事에 간여하거나 휩쓸리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부 정치적인 성직자들을 모든 성직자들의 표본으로 보는 건 아닐까 싶은 우려가 있다.
어쩌면 세상과 타협하며 돈을 모아들이는 성직자들이 있기에 수도하는 성직자들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상사 웃기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다시는 무슨 박물관에서 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분도 자기가 본 스님을 통해 모든 스님들을 평가하는 듯 느껴지기에 우습다는 것이다.
하긴, 그 오만방자하다는 무슨 박물관 스님께서 아무에게나 반말지거리를 했기로 현장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느 한쪽 말만 듣고 그 스님을 평가할 입장은 못 된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요즘의 우리나라 종교계는 지나치게 못 보일 추태를 일반인들에게 많이 보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한다.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검은 법복을 입고 일방적으로 어느 정파, 어떤 이념 등의 편을 드는 듯 생각 되는 주장을 목소리 높여 외쳐대는 짓들을 다반사로 해치우니 우리 중생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학교 선생님들이 노동자연 하면서 전교조라는 걸 만든 거나 진배없을 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다.
어떻게 보면 종교가 타락한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종교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성직자들이 있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암흑시대라 불릴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중세시대의 가톨릭 종교재판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나라에 정착한 불교 역시 타락한 성직자를 적지 않게 배출했다.
유교적 문제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들 종교가 추구하는 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이든 절대적인 건 없는 거지. 성직자들도 이런저런 사람 있게 마련이고.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가 분명한 다음에야…….”
어느 책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독교에서는 사탄을 하느님을 배신한 천사로 해석하는 듯 보이지만 홀로 존재하는 신이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상대성 준거점을 마련해야 했기에 음양으로 분리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음과 양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함으로써 인식의 세계가 창조되었고 세상이 나타났다는 개념이다.
뭐,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의 한 분파의 주장을 들어보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사람들이 인식함과 동시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모든 물질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원자와 미립자, 뭐, 그런 것들이 합해져서 운동에너지를 발생시켜야 한다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간의 관심이라니 이 주장이 종교적 논리인지 물리학인지 얼떨떨하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상대성, 즉 준거점이 마련되어 세상이 나타났다는 설명과 비슷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음과 양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개념으로 보면 천사나 사탄이라는 개념도 결국 음과 양으로 볼 수 있고 선과 악 역시 음양의 원리에 불과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따라서 악이라는 개념도 삶의, 생명력의 근본이기에 그 삶 속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개개인의 자유의지일 뿐, 옳고 그름으로 갈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내가 이 책을 읽었을 때가 고교시절이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작가와 제목을 잊었지만 당시 어린 나이에 크게 공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좋게 보는 사람이 있고 그르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안에도 좋다고 느껴지는 것과 그르다고 느껴지는 것이 공존하고 있음을 늘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헬만 헷세도 ‘데미안’에서 ‘아프락사스’라는, 즉 ‘선과 악은 공존한다’고 주장했다. 창조를 선으로 보고 파괴를 악으로 본다면 새 생명이 태어나는 원리가 파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논리다.
중학교에 입학했던 해에 읽었던 책이라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굳이 헬만 헷세의 철학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자연의 섭리를 볼 때,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 나타남의 세계가 지니는 원리라고 할까.
깨우쳐보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깨우침도 상대성 원리로 나타난 세계이기에 얻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짐작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 그 어떤 조직, 그 어떤 존재라도 긍정적 측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으리라는, 그 상대성을 통합하는 것이 신이요, 혹은 깨우침이라는…….
종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할 뿐, 그 어느 쪽으로 전적으로 치우칠 수 없는 것이 우주생성의 섭리라면 종교조직의 내부 사정이라고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는가.
수많은 성직자들 중에 깨우침이나 하느님과의 일체됨을 목표로 열심히 수행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돈벌이의 수단으로 성직을 이용하거나 허망한 명예욕에 성직을 이용하는 자들 또한 없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득도하셨다는 스님들 중, 어느 분이 하신 말씀이 있다.
‘깨우침은 없다. 깨우친 삶이 있을 뿐이다.’
이 말씀을 이해할 듯도 싶지만 도를 닦는다고 모두가 성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종교인들도 어쩔 수 없이 우주의 물리적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고 나름으로의 생각이 없을 수 없기에 우리 범인들처럼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있으려니 하면 그만일 것을 오히려 성직자라는 테두리에 가둬놓고 보기에 필요 이상 실망하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성이 생긴다는 거다.
우리 주민의 생일이라 가급적 좋은 말로 끝내고 싶지만 그래도 정말 싫은 게 있다. 정치적인 성직자들만큼은 정말이지 싫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위대한 부처님이나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느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즘처럼 답답할 대에는 선승님들의 견성이란 어떤 세계일지 정말이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