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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정부보고서
제목 : 김익렬 기고문
작성자: 비바람 조회: 16900 등록일: 2013-04-27

부록〉김익렬의『국제신문』기고문

 

게제일 : 1948년 8월 6일/7일/8일

(※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대부분 현행에 맞추었고, 한자는 그대로 수록함)

1948년 8월 6일

 

同族의 피로 물들인 濟州參戰記

前 弟九聯隊長 金益烈 中領 記

 

남해의 고도 …… 제주도는 우리에게 가슴 아픈 쓰라린 기억을 남겨주었다. 어찌하여 우리는 싸워야 하였으며 또 싸우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 것이냐? 성봉 한라산(漢拏山)만이 이 동족간의 처참한 “피의 기록”을 아는 듯 말없이 서 있고 파도치는 백사장에는 무심한 갈매기 떼만이 동방(東方) 약소민족(弱少民族)의 비극을 아는 듯 처량히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고 싶지 않은 싸움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몸소 체험한 쓰라린 교훈은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평화와 독립을 찾기 위하여 통일과 단결과 그리고 아름다운 동족애로써 이 아슬아슬한 위기를 헤엄쳐 나가지 아니치 못하는 까닭에 이번 제주도사건을 철저히 분석하고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수평선 저쪽에 본토(本土)를 바라보며 전통과 근면(勤勉) 속에서 살아온 평화의 섬나라 … 제주도에도 해방이 가져온 모진 바람이 불었으니 그것이 곧 “산사람”과 군경(軍警)의 무력충돌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동안 당국도 각종의 보도기관도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는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소위 “산사람”이라고 부르는 반란군(叛亂軍)의 정체며 그들을 지도하는 수령(首領)에 대하여는 하등의 보도와 발표에 접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조직되었으며, 무슨 방법으로 무력대항을 하였으며 그 최고지휘자는 과연 어떤 인물일 것이냐? 다행히 본사(本社)는 당시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제주도 최고지휘관(濟州道最高指揮官)으로 있다 사령부(司令部) 소속으로 전임한 김익렬(金益烈) 중령(中領)이 말하는 반란군 지휘자 김달삼(金達三)과 김중령과의 회견기를 게재함으로써 금차 사건의 편모를 소개코자 한다. 다음은 김익렬 중령의 수기(手記)의 一부이다.

 

무엇 때문에 流血?

(上) 낮에는 農夫 밤에는 山사람部隊

 

當日의 回憶

 

지난 四월三일 새벽三시를 기하여 제주도 十一개 경찰지서와 관공서(官公署), 우익정계요인(右翼政界要人)의 암살과 방화 등을 감행한 좌익계열의 폭동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채 동족상쟁의 피어린 참상만이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을 따름이요 아직까지도 반란군진두(叛亂軍陣頭)에서 총지휘를 하는 소위 인민군총사령(人民軍總司令)의 정체(正體)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필자와 필자의 부관(副官) 두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그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며 전투지휘가 상당히 능하느니 뭐니 하여 사실 아닌 사실이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아듸프로』(선동․선전-필자)가 횡행함을 볼 제 필자는 적지 않은 불만을 느끼는 바이며 그릇된 선전을 시정하려는 의미에서 직접 인민군사령관이라 칭하는 김달삼(金達三)(二三)과의 二시간여의 회담기를 발표하여 사회 여러분들의 정당한 판단에 맡기려는 바이다.

 

發端은 警察에서 山사람이 되기까지

 

사건의 발단은 소위 四․八二파업사건(1947년의 전국적인 27총파업 또는 제주도의 관민총파업인 310총파업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필자주)과 三一기념행사 관계로 제주도내에서 약 二천五백 명의 청년이 경찰에 구금(拘禁)되었고, 이 구금으로 3명의 고문치사(拷問致死)자가 생기고 三월 十五일 치사자 이(李) 모라는 청년의 시체(屍體)를 투강(投江) 하려다가 그 가족들에게 발견된 것이 극도로 민심에 큰 충격을 준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민심은 차차 극도로 악화하여 三월 二십八일 애월리(涯月里) 산간부락에서 약 二백여 명의 도민이 무장하고 전투훈련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비대 측에서는 四월 二일 당시 제주도경찰청 김영배(金英培)청장과 군경 협조하여 모종사건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협의를 굳게 하고 필자는 한림(翰林)에서 숙박하고 있는 동안 그 이튿날 새벽에 제주도 一대에 이 사건이 발생된 것이다. 그러나 경비대로서는 상부의 명령이 없음으로 아무런 행동을 개시하지 못한 채 만반의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고, 낮에는 농부(農夫)고 밤에는 반란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은 소위『산사람』의 정체를 분별하기 어려운 도외(島外)에서 온 경찰대(警察隊)의 무차별 사살은 상호간 너무나 엄청난 살생이 생겼을 뿐더러 무력(武力)으로써는 도저히 동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事態는 去益混亂 雙方會合提議

 

관계에서는 제주도 유지와 관공서원이 주동이 되어 시국대책위원회(時局對策委員會)를 조직하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이 주동이 되어 시국수습특사대(時局收拾特使隊)를 조직하고 반란군 측과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동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이 좋은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경비대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개시한 것은 四월 二십일 증원부대(增援部隊)가 제주도에 오고서부터이다.

그러나 경비대의 근본방침은 사살(射殺)보다는 선무에 주력을 두었다. 그러함으로 경비대가 좌익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한 가지 조건이기도 하였다. 동족상쟁하는 싸움마당에서 다 같은 민족끼리 더구나 단일민족인 우리 대한국민으로서는 차마 총부리가 똑바로 가지 못하는 것도 그 당시에는 속일 수 없는 민족적 감정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四월 二二일 상오 十二시『민족사상을 고취하고 동족상쟁의 비극을 피하며 평화적 해결을 하기 위하여 四월 二십四일『너희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책임자와 직접 면담하되 신변은 절대 보장할 것이며 이러한 평화적 용의에 응하지 않으면 산상으로 올라가는 보급선을 중단하며 최신식 기계화 부대를 동원할 것이다󰡕(꺾쇠 표시 원문대로임-필자) … 라는 선포문(宣佈文)을 비행기로써 산포하였다.

 

傳單을 交換 身分保障을 念慮

 

四월 二十四일 상오 六시에 󰡔평화회담에는 응할 용의가 있으나 신분보장 한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작년 서울에서도 신분보장 운운하고 체포한 사실이 있는데 믿을 수 없다󰡕고 삐라로써 회답이 왔다. 四월 二十五일 󰡔절대 신변 보장한다󰡕는 고문(告文)을 또 뿌렸다. 四월 二십六일 또 삐라가 전달되었다. 󰡔경비대의 신사성(紳士性)을 믿는다. 二十九일 十二시 경에 회견하되 장소는 추후 통지하겠다󰡕고 회답이 왔다. 이 삐라를 받은 경비대에서는 즉시 참모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담 진행에 관한 사항을 토의하였으나 5․1 메-데를 앞둔 四월 말이니만치 방금까지의 전투행동을 중지하고 二十九일까지 기다리는 것은 반란군 측의 세력을 만회(挽回)시키고 5․1메-데의 모종행사에 큰 힘을 주는 것이 된다고 하여 二十九일까지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결의를 보게 되어 二七, 二八, 二九 三일간은 맹렬한 전투를 개시하였는데 이 전투는 제주도 소탕전 중 제일 격렬한 전투였고 이 전투로 반란군의 보급선의 一부를 단절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반란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러한 전세(戰勢)로 十여일 내외에는 완전히 반란군을 선무할 수 있을 만큼 되었던 것이다. 二十九일 상오 十二시에 정보부(情報部)에는 광목잠뱅이에 밀짚모자를 쓴 三十四, 五세의 중년 농부가 반란군의 연락으로 경비대를 찾아왔다. 얼굴빛은 비록 검다고 하나 넓은 이마와 광채 나는 눈은 심상치 않을 뿐만 아니라 완전무장한 경비대원의 보초선을 유유히 활보하는 모양은 비록 반란군이기는 하나 남아(男兒)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음을 칭찬할 만 하였다.

 

單騎로 處窟에 生死難測의 行程

 

그는 간단한 인사가 있은 후 三十일 상오 十二시에 안덕면(安德面) 산간부락에서 회견할 것을 제기하고 공격이 심하였음을 말하는 한편 무조건하고 항복한다는 말까지 전하고는 회견하는 데는 쌍방 모두 三인 이하로 하되 경비대 측에서는 총지휘관인 연대장과 그 밖에 두 사람으로 하고 무장은 서로 사양하자고 말하였다. 나는 이러한 조건을 무조건하고 수락하였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든지 간에 만나고야 평화적인 해결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연락원이 돌아간 후 경비대에서는 즉시 참모회의를 개최하고 이러한 정도의 요구조건(要求條件)에 대한 우리들의 응수조건(應酬條件)을 토의하고 그날 밤 나는 나의 집에 나가서 잤다. 아니 잔다는 것보다는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무차별하고 사살하는 반란군 측의 진중에 들어가야만 할 나의 신변을 생각할 제 이 마지막 길을 가는 사형수의 가슴 쓰린 마음을 생각하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군인이라는 적지 않은 자부심은 이러한 큰 문제를 앞에 놓고 나에게 큰 편달의 힘을 주는 것이다. 만일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은 하고 나의 주위에 있는 여러 가지 것을 정리하고 밤이 늦게 유서를 두 통 써놓았다. 한 통은 가족에게 주는, 한 통은 제갈량(諸葛亮)이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에서 강유(姜維)에게 주던 것과 같은 후군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아내가 병영에 들어오는 것까지 거부하였다. 비밀군무관계라고…. 일이 끝난 다음 아무런 근심 없이 자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머리를 만져보기도 하였다.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튿날 아침 나의 가족에게는 서울까지 군무로 출장 간다고 말하여 놓고 경비대에 돌아왔다. 동행할 두 장교를 제외하고 모든 장정을 모아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중에는 나의 가는 길이 슬픔의 길이라는 듯 눈물을 흘리는 장교도 몇 사람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약한 모양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평시 같은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 두 사람의 부관 그리고 자동차 운전수 도합 네 사람은 커다란 해망과 슬픔을 가득 품고 산상으로 달렸다.

 

1948년 8월 7일

*動亂의 濟州參戰記 - 前 第九聯隊長 金益烈中領 記

深山到處에 警戒線

(中) 꽃그늘에 덮인 司令部는 蕭條

好奇와 恐怖 羊腸九曲을 돌아서

 

산이라고 하여도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있다. 이 도로는 일본군(日本軍)이 본토작전에 대비하고자 제주도 한라산 산록 일대에 강제부역으로 만든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병호(散兵壕), 토굴(土窟)이 이곳저곳에 있다. 반란군들은 이것을 근거지로 모든 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一행은 연대본부를 떠나 二O마일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는 한라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 도로 좌우편엔 제주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돌덩이가 제멋대로 쌓여있고 그 사이에는 풀덤불 가시덤불이 엉키어 있었다. 어제 연락 왔던 농부의 말과 같이 적당한 장소에서 안내를 하겠다는 산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감시하고 있는지 도무지 분간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자동차는 쉴 사이 없이 이 돌담(石墻) 사이를 달리고 있다.

길이 돌담을 따르는지 돌담이 길을 따르는지 돌담은 줄창 길옆에 좁은 성(城)을 이루고 있고 우리 一행의 마음도 이 길 모양 한결같이 호기심과 공포감으로 주마등같이 설레고 있었다.

“정지!” 어디선지 무게 있는 호령소리가 들렸다. 긴장했던 참에 우리 一행은 적지 않게 놀래었다. 자동차 운전수는 무의식중에 차를 멈추었다.

 

숲 속의 伏兵 의심 품는 산사람

 

바라다 보이는 돌담 위에 일본 九九식 보병총을 메고 일본육군 철투를 쓴 젊은 사나이는 산사람이라는 것이 의심할 여지도 없지만은 광목베잠뱅이가 군데군데 흙이 묻은 것 등으로 보아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一행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하는 양을 바라다 볼 뿐이었다. 사실 그들의 한 두 사람을 체포하거나 총격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그렇게 할 무기도 우리 一행은 가지고 있지를 아니 하였었다. 그 농부군인은 잠시 우리의 행장과 태도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돌담에서 뛰어 내렸다. 󰡔연대장님 수고하시오󰡕 확실히 제주도말은 아니

었다. 우리 一행은 아무 말도 아니하였다. 다만 그 농사꾼의 태도와 주위를 유심히 바라다 보았을 뿐. 사실 그 주위 돌담 사이에는 약 二십여 명 가량으 로 추정되는 반란군들이 복병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九九식, 칼빈, M1 등이라는 것 도 알 수가 있었다.『이 길로 좀 더 가다가 왼편으로 올라가시오』이것은 그 폭도가 우리 행장을 다 보고난 뒤에 길을 안내하는 말이다. 우리 一행은 역시 아무 말대답도 없이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자동차를 몰았을 뿐이다. 이제는 제법 산중에 들어왔다. 멀리 동남간으로 바라다 보이는 한라산의 용자(勇姿)는 오늘의 좋은 성과를 상징이나 하는 듯 뽀얀 구름을 산중허리에서부터 슬슬 돌려 감고 있고 해발 三백 미터들이나 되는 이 지점에서, 우리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대대(大隊) 중대(中隊)들의 자동차와 병사들이 성양곽(성냥갑-필자)을 흩트려 놓은 듯이 내려다보인다.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到處에 步哨 지게 진 女人部隊

 

그것은 이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우리 진지와 행동을 알고도 좋은 전과(戰果)를 갖지 못하는 반란군 측의 군사지휘도 가히 짐작할 것이며 그들 산사람들에게 중화기(重火器 野砲 重機關銃) 등이 없다는 것도 다행하기도 하였다. 엔진소리도 요란히 달리는 자동차의 면전에는 지게를 진(이 地方에서는 女子도 지게를 진다) 수 三인의 여인들이 있음을 보았다. 며칠 전 전투에도 지금 저 여인들 모양으로 산상에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저들도 필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여인들이라는 것은 가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정차(停車)!” 이 여인들도 역시 보초(步哨)의 한 사람들이었다. 역시 그 좌우 돌담과 수풀 사이에는 약 四십 명으로 추정되는 복병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여인은 아까의 농부 모양으로 우리들의 행장에 상당한 주시를 하는 모양이다. 한참 만에 우리는 이 둘째 번의 보초선을 통과하였다.『왼편으로 꼬부라져 오른편으로 돌고 좀 더 가다가 또 왼편으로 돌으시오』이것이 그 여인들이 일러주는 길안내였다. 우리는 역시 한마디 말도 없이 일러주는 길만 따라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확실히 길을 일러주고는 즉시로 근거지로 연락을 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 一행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벌써 연대본부를 떠난 지 一시간 三O분이 되었고 거리로는 약 四십 마일을 올라왔으나 아직 어디에서 만나게 될 것인지는 우리로서 추측하기도 곤란하다.

 

草幕司令部 처음 對面에 一驚

 

처음 출발할 즈음에는 마음이 산란도 하였지만은 막상 이러한 지점에 와보니 그리 겁나거나 초조로울 나위도 아무 것도 없이 무슨 반드시 오고야말 필연 같은 사명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기분과 이 회담이 원만하고 확실히 성공을 보게 된다면? 하는 기대와 내가 요구할 몇 가지 조건, 들어줄 조건 등을 몇 번씩이고 외워보곤 하였다.

 

여인지게꾼部隊

 

하염없이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 나의 입장과는 좀 다르기도 하니까 무리는 아니겠지만은…….

『집이 보이유!』운전수는 놀란 어조로 고함을 쳤다. 확실히 집이 보였다. 초가三간 문자 그대로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이었다만은 저 집이 필시 그 무슨 곡절이 있는 듯 산사람들은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저 집 속에 나와 만날 반란군의 지휘자 있는가 느낄 수가 있었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집도 확실히 엿보이고 그 집 앞에는 아까의 농부군인 모양 철모에 九九, 칼빈 보병총을 맨 한 사람의 폭도가 서 있었다. 우리의 차는 그 폭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 폭도병도 역시 우리의 행장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산간농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깨끗이 소제가 되어 있고 들에는 백일홍(百日紅), 봉선화 등 여름을 자랑하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비록 조그마하지만 돌을 이리저리 치우고 몇 가지의 야채도 심어놓았고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이 무슨 지저분한 구호(口號)나 삐라 등이 하나도 눈에 띄지도 않을뿐더러 붙였던 자리조차 발견할 수가 없다. 물론 이렇듯 깊은 산 속에까지 경찰이나 청년단체들이 들어오지는 않을 곳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본 바에 의하면 확실히 한 농가에 불과하였다.

화초를 가꾸어 놓은 것과 뜰 소제가 깨끗한 것 등은 이 집에 어린아이나 젊은 여인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보초병은 자동차와 운전수를 밖에 남겨두고 우리 三인을 방으로 안내하였다. 방안도 역시 아무런 장치도 벽보(壁報)도 없는 보통 농가의 방이고 다만 이 회담을 하기 위한 멋대로 만든 책상이 하나 방 가운데 놓여 있었다.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면서 젊은 사나이가 부하인 듯한 또 하나의 청년을 데리고 들어왔다.

“동무 오시느라 수고했소” 앗! 나는 그 순간 너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너무나 의외였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던 반란군의 지휘자와는 너무도 상반대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이 때 시간은 정각 十二시 조금 전이었다.

 

1948년 8월 8일

*動亂의 濟州參戰記-當時의 司令官 前 第九聯隊長 金益烈 中領 記

彼我의 一張一弛

平和手段의 解決策 드디어 水泡

꽃 같은 美丈夫 司令大名은 金達三

 

반란군사령이라고 하면은 누구나 다 봉두난발(蓬頭亂髮)하고 그 사람의 인상(人相)도 좀 험하리라 생각될 뿐 아니라 음성(音聲)까지라도 무시무시하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본 소위 인민군사령이라는 사람은 정말 놀랄 사람이었다. 마치 무슨 영화에 나오는 인기배우와도 같이 맑고 넓은 이마와 검은 눈썹 아래 별 같이 반짝이는 두 눈, 키는 좀 큰 편이나 몸집은 그리 건강치 못하다기보다는 가냘픈 축이었다. 산에서 진두지휘를 하였을 양이면 피부 빛이라도 검붉을 것인데 살빛은 모란꽃 같이 뽀얗고 새로 만든 듯한 소위 마카오 곤색 내리닫이 무늬 있는 양복과 복숭아 같은 빛깔의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도 서울서 유행되는 마카오제품이었다. 구두는 미국장교들이 신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양말도 역시 외국품이었다. 아무튼 어느 모로 보든지 간에 반란군 지휘자라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요 몸차림이었다. 나는 얼마 후에 비로소 입을 열어 우리는 조선의 예법에 따라 예의로써 시작하고 예의로써 끝마치기를 제의하였다. 그도 역시 동감이라는 듯이 빙그레 웃었던 것이다. 목소리, 웃는 모습 좀 보기 드문 미남자(美男子)였다. 그는 자기의 성명을 김달삼(金達三)이라고 말하였다.

 

超모던의 차림 身分은 묻지 말라

 

나도 나의 이름을 일러주고 나이는 몇 살이나 되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서로의 신분이나 과거, 미래, 현재에 언급하지 말자고 하므로 나도 그리 알아둘 필요도 없고 구태여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는 二三에서 二五사이의 청년이고 말솜씨는 서울지방 말이며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같이 생각되었으며 특히 그는 침착한 태도를 취하였다. 나는 자주 열려있는 문으로 실외(室外)를 보았다. 이 집 앞에는 역시 돌담이 쌓여있는데 그 돌담 틈으로 총구멍이 웅긋중긋 박혀있는 것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김달삼의 태도를 엿보았다. 그는 확실히 당황하였다. 얼른 이 눈치를 챈 김달삼의 부하는 방문을 닫았다. 나는 마침 가지고 있던 가족사진을 보이며 당신도 가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퍽이나 처량한 얼굴을 지었다. 그 순간 김달삼은 무슨 결심이 있는 듯이 회의진행을 재촉하였다. 『여기가 바로 당신의 숙소요!』하고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해보았다.『아니오. 이 회의를 위하여 좀 빌렸을 뿐 이지요……』문이 열리며 나이가 한 스무 살 쯤 되는 여자가 보리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것도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 미남자 김달삼이와 비교하여 어떠한 의미로서는 좋은 동무라고 볼 수 있듯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麥茶로 接待 수수께끼의 居處

 

그 여자는 머리를 파마하였고 값진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김달삼을 가르켜 이 친구는 남자를 선동하고 저 여자는 부녀를 선동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여자는 내가 그리 자세히 볼 사이도 없이 나가버렸다. 김달삼은 차를 권하였다. 나는 웃으면서 이 차는 먹고 배 앓는 것이나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그도 따라 웃으면서 글쎄 적당히 생각하여 주시오 하고 자기가 먼저 찻종을 들었다.

내가 미리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와도 달리 김달삼이가 인간적으로 그리 악인 같은 인상(印象)이 없고 기치창검(旗幟槍劍)이 삼대같이 들어서 있는 곳이나 아닌가 하는 예측도 아주 보이지도 않는 산중이거니 한 것이 경비대 주둔지구에서 쌍안경으로 자세히 보면은 우리가 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도 볼 수 있다는 것 등이 나의 마음의 안도감을 준다기보다는 믿는 마음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농담을 하였다. 지금 그 여자는 누구요? 이 미지의 여인의 정체를 알고도 싶었다. 그는 다만 이 집 딸인 모양이라고 말끝을 흐려버리고 말았다.

 

담배는 “럭키” 會議開始를 催促

 

그는 나에게 담배를 권하였다. 그 담배는 제주도내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럭키스트라익󰡕이었고 장난삼아 만지작만지작 하는 󰡔라이터󰡕는 󰡔오-스토라리야󰡕제품이었다. 그러한 미국 물품은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 하고 웃음의 말로 던지었다. 이 모든 것은 미군이 보급하여 주는 것이지요! 하고 역시 농담을 하였다. 더 싸움을 계속할 수가 있소? 하고 나는 뜻밖의 이야기를 건네자 김달삼도 긴장한 얼굴로 󰡔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왜 항복하는 것이요. 항복이라기보다는 이 농번기의 저 많은 농민들이 불쌍한 것이요 하고 그는 자기 주위에 많은 농민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였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한 폭의 제주도 지도를 꺼내어놓고 안덕(安德)서 한림(翰林) 두 면간을 연필로 쫙 그으면서 이 지구가 제일 중대하지요? 하고 그의 태도를 엿보았다. 이 지구는 반란군 측 본부와 그 외 분대간의 연락과 식량의 보급선이었던 것이다. 그는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여도 상당한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있어는 이 지구가 생명선이기도 하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하고 그는 다시 한번 재촉하였다. 나도 이에 응하여 이 회 의의 진행은 경비대측이 맡아보겠다고 선언하였으나 그들은 별로 반대하는 말도 없이 회의는 곧 시작하기로 되었다. 나도 물론 그러하였겠지만은 회의가 선언되면서부터 김달삼은 몹시도 긴장한 것이었다.

 

劈頭에 一喝 責任所在를 追窮

 

나는 말하기를 왜 우리는 동족끼리 싸워야 되며 그것도 그칠 줄 모르는 장기대립(長期對立)이 될 것인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냐고……. 더구나 이번 이 반란으로써 귀중한 우리국민의 생명이 수없이 쓰러진 것은 누구 하나의 잘못보다도 통절히 비애를 느끼는 바이므로 너희들도 진정한 민족적 감정에서 다시는 이러한 무모한 반란을 절대 금지하여 줄 것을 맹서하라고 자못 준열한 선언을 하였다. 김달삼도 말하기를 금번의 전폭적인 항복을 생각한 것도 사실은 우리가 이 이상 전투지속이 불가능하여서가 아니라 저 수많은 인민들이 불쌍하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정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은 다시 이러한 인민봉기(人民蜂起)가 없기를 말하였으나 “현 남조선의 미군정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는 딱 잘라서 말소리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나는 군인이니만치 정치적인 모든 것은 알지도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번 너희들의 반란이 결코 남조선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도 그 어떠한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상투적인 구호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긴장한 태도로 돌아가 나는 경비대 최고지휘관으로써 다음의 세 가지를 제의하였다.

一. 完全한 武裝을 解除할 것

二. 殺人 防火 强姦犯人과 그 指導者의 全面的 自首

三. 所謂 人民軍의 幹部 一切를 人質로써 구금한다

四. 但 以上 三條件은 條約日로부터 七日間으로 한다

대략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이었다.

 

正當한 抗爭 犯罪者는 아니라고

 

김달삼은 얼굴을 붉히며 一, 二 조건은 다 복종할 수가 있으나 三조건만은 복종할 수 없다. 이것은 지금 범인(犯人) 취급을 당하고 있는 우리는 어느 점으로 보아서나 범죄로써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범죄로써 구성된다면은 경찰과 사설단체의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은 어째 범죄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경찰과 사설 청년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번 인민봉기를 해석하기가 싫다. 사실 금번 사건의 책임은 경찰과 사설청년단체들에게 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인민대중의 고혈(膏血)을 기부(寄附)로써 강요하거나 자기들을 환영만 잘못하여도 좌익이니 빨갱이니 하여 구금 혹은 모함 ○○하여 왔으니 이것을 정당방위하기 위하여 제주도인민은 봉기한 것인데 이것을 범인으로써 취급한다는 것은 뜻밖이라고 김달삼은 점점 침착하여지며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통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항복한다는 전제조건 하에 이 회담이 시작된 만치 이만한 조건은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는 것을 각오하여야 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여 주었다. 김달삼은 우리의 요구조건은 一단 수락하고 반란군 측의 제반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다.

一. 單政反對

二. 濟州道民의 絶對自由 保障

三. 警察의 武裝解除

四. 濟州道內 官廳 高級官吏를 全面的으로 更迭할 것

五. 官廳 高級官吏의 收賄者를 엄중 處斷할 것(數十狀 되는 名簿를 提出하였다)

六. 道外 靑年團體員의 山間部落 出入禁止

등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든 조건은 나로써의 받을 수 없는 것뿐이므로 전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였고 다만 인민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구호를 알선하고 범인의 一시적 구금만은 경비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므로 그 외는 행정관리들에게 잘 주선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논쟁도 있었고 의견대립도 있었다.

 

萬事休矣! 總攻擊을 開始

 

결국은 경비대 측의 요구대로 통과를 보게 되었고 그들의 요구에 의하여 나는 나의 가족 전부를 一주일간 인질(人質)로써 그들이 내밀히 감시하기를 결정하였다. 한편 경비대 간부 일명과 병사 수명으로 조직된 분대를 많이 작성하여 전면적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과 경비대는 산 밑에 분산 주둔하고 인민의 귀속에 편리를 도모하도록 할 것을 결정하였다. 회의가 무사히 끝나갈 무렵 우리들은 악수를 하고 헤어지려 하였다. 김달삼은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어 자기 머리를 향하여 겨누고 며칠 남지 않았소 하며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우리는 방에서 나왔다. 나는 웃는 말로 일이 잘 되었소. 만일 十여일만 더 계속하였으면 이 집 있는데 무장군이 올라왔을 것이다…. 두 사람은 마주 웃었다. 그렇지만은 나는 어떤 의미로 보아 수만의 동지를 획득하였소. 이것은 경찰 경비대 사설청년단체 등이 절대로 협력하여준 덕택이기도 하오…….(사진 上은 작전본부, 下는 산사람들)

내가 경비대에 돌아온 것은 오후 四시가 지난 다음이었다. 대원들은 내가 살아 돌아옴을 기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은 내 자신도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시작한 작전회의와 최고부의 명령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이제는 반란군의 근거지를 알았으니 곧 총공격을 개시하라는 것이었다. 나와 김달삼과의 회견은 하나의 전략(戰略)적인 것이라고 최고부에서는 말하였다. 나는 그 의도는 전략적이었으나 이 사건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하여 또한 유一한 방법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으나 나의 의견은 통과를 보지 못하고 그날 밤부터 총공격은 개시되었고 반란군도 상당한 기세로 대전하여 왔으며 모슬포에 있는 나의 가정에는 이날 밤부터 폭탄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누구인지는 모르지만은 동네 부녀자로 생각되는 여인들은 물동이에다『다이너마이트』를 넣어가지고 돌담 너머로 던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회담이 있은 얼마 후에 최고사령부 명령으로 모 지구에 전임(傳任)하였던 것이다.(끝)

一九四八年 六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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