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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대한추억 5 (박정희 대통령 재임중의 일화)) |
작성자: 地中海 |
조회: 16088 등록일: 2013-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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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양력 11월 14일을 생일로 지켰다.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거나 케이크를 자를 뿐이었다. 어느 해인가 육여사의 생일에 내가 『축하합니다』고 했더니 육여사는 의외로 『그런 것은 몰라도 돼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여름휴가를 진해에서 보냈다. 진해 앞바다에는 저도라는 섬이 있었다. 대통령은 낮에는 이 저도에 가서 쉬다가 진해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이동 중에 해군의 엄호가 따르는 등 여러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본 박대통령은 1972년 여름에 박종규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저도에 있는 일제시대의 목조건물을 수리해서 잘 수 있도록 해놓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1973년 여름 박대통령은 고속도로를 따라 진해에 도착하였다. 나도 수행하였다. 박대통령은 지방에 갈 때는 지만군을 옆에 앉히고 지나치는 마을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설명하곤 했다. 저 마을의 소득원은 무엇이고, 이 터널의 길이는 몇 미터라는 식으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짚어주곤 하였다.
그날 진해에 밤에 도착한 박대통령일행은 밤늦게 저도에 상륙하였다. 거기에는 목조건물은 없어지고 새 돌집이 한 채 서 있었다. 일반주택만한 2층건물이었다. 호화주택으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새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실장을 불러』라고 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나타나자 벼락치듯 꾸중을 했다.
『집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마! 도로 나가자』 김정렴 비서실장이 나서서 만류했다. 『오늘밤은 주무시고 가시지요. 진해 공관은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박대통령이 하룻밤을 머무는 사이에 측근들은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 집을 지은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저도에 미리 와 대기하고 있었다. 측근에서는 박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정회장이 직접 나서면 대통령이 화를 풀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 측근에서 대통령에게 『정주영 회장이 와 계십니다』고 보고했고, 박대통령은 정회장을 올라오라고 했다. 정회장은 『각하, 제가 새로 짓도록 했습니다. 각하께서 쓰시는데 저의 사재인들 아깝겠습니까. 돈이 많이 들지도 않았습니다』고 해명을 해 대통령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후 알려진 바로는 현대건설에서 실비 변상을 받았다고 했다.
박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수단으로 재벌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가진 자들의 호화판 생활이나 재벌의 횡포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공화당 중진의 김모 의원은 신축한 자택에 박대통령을 모셨다가 혼이 난 경우였다. 김의원은 『사실은 저의 형님이 도와주어 지은 것입니다』고 변명했다. 박대통령은 『그 형님은 차관 받아 집만 지었나?』고 쏘아주더란 것이다.
변기물통에 벽돌 한 장
청와대에서 박대통령이 실천한 근검절약은 너무 심할 정도였다. 여름에 냉방기를 켜지 못하게 하고는 당신은 집무실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와 부채로써 더위를 견디었다. 겨울에도 난방기 트는 데 인색하여 직원들은 속옷을 두껍게 입고 더운물이나 커피를 자주 마시면서 한기와 싸워야 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 화장실 변기속에 벽돌 한 장을 넣어 두게 했다. 그만큼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10?26사건 뒤 청와대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박대통령의 침실의 변기 물통에서도 벽돌을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침실이면 다른 사람이 들어갈 리가 없는 곳이고 그런 절약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빅대통령은 절약을 쇼로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했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력을 아낀다고 집무실에서 책상 위 전등만 켜 놓고 일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저녁 때 누가 들어서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야?』라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입던 양복과 신던 구두를 그리고 넥타이 따위를 측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내가 박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양복을 약간 고쳐 입고 출근했더니 그렇게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육여사도 입던 한복을 줄여 근혜씨에게 넘겨주었다. 박대통령은 구두의 뒷창뿐만 아니라 앞창에도 고무판을 덧붙여 신었다.
박대통령은 사범학교 학생.교사.군인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인지 정리·정돈의 습관이 체질화돼 있었다. 허리띠의 바클은 늘 중심에 와 있었고 허리띠의 여분이 길게 나오지 않도록 했다. 회의 때 박대통령이 앉은 탁자 위에는 메모지, 재떨이, 필기도구가 놓인다. 박대통령은 그것들을 직선으로 다시 맞춘 다음에 두 손을 무릎위에 놓곤 하였다. 이것이 회의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박대통령은 가끔 지만군의 방을 불시점검하고는 『이게 뭐야? 정돈 좀 할 수 없나』고 꾸중을 내렸다. 어느날 박대통령은 육여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가 『임자, 그 방에 있는 책정리 좀 하지?』라고 했더니 육여사가 『지금 바쁜데 그런 것은 천천히 하지요』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옆에 있던 나에게 『김군, 자네는 군대에서 내무사열도 안 배웠나?』라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박대통령은 『나하고 가자』면서 일어서더니 부속실 전석영씨까지 데리고 창고로 갔다. 직접 문을 열더니 『이것 정리좀 해. 이래가지고 재고를 어떻게 파악하나』라고하면서 정리하는 방법을 일일이 지시했다. 대통령 집무실에는 책상 뒤에 문갑이 붙박이처럼 붙어 있었다. 박대통령은 메모용지, 가위, 자, 스카치 테이프 등 문구류를 직접 정리해 두고 꺼내 썼다.
나는 박대통령이 당황하거나 서둘고 허둥대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박대통령은 늘 정리하고 계획하며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박영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일할 때였다. 박대통령이 동남아 순방에 나서기 하루전인데 갑자기 박비서관을 부르더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내가 깜박 잊고 갈 뻔했다.』면서 민정반 활동비를 건네주더란 것이다. 『출국을 하루 앞둔 시기에 그렇게 사소한 데까지 신경을 쓰는 데 질려버렸다』고 나중에 회고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박대통령이 대용식량의 하나로서 밤나무 등 유실수 심기를 독려하고 있을 때였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뜰에 밤나무를 심도록 했다. 물과 비료를 어떻게 주라는 식으로 자세한 지침서를 써 총무비서실에 내려보냈다. 밤이 1년쯤 일찍 열리자 다섯 개의 밤알을 김현옥 내무장관에게 내려 보내면서 메모지에다가 그동안 가꾼 요령을 적어 보냈다. 김장관은 이 밤알을 알콜병에 넣어놓고 그 옆에 대통령의 메모를 표구해 걸어두고는 관계공무원들이 오면 베껴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담함과 세심함
언젠가 한번은 내가 퇴근을 하려는데 육여사께서 저녁먹고 영화보고 가라고 하셔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뒤 박대통령 내외분과 함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나는 꽤 재미있는 영화려니 했는데 그날 상영된 영화는 문화영화 4편이 전부였다.「고구마 온상 재배법」「밤나무 재배법」 「독도를 지키는 경찰관」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박대통령이 탁자위에 메모지를 놓고 영화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대통령의 대담함과 세심함 때문이었다. 5.16거사에 참여한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박장군은 한강다리를 넘을 때 사격을 받아 해병대·공수단병력이 움직이지 못하는 위기를 맞았다. 측근에서 『일단 물러납시다』고 하니까 박소장은 『야, 우리가 모두 여기서 죽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KBS를 통해 5.16거사를 처음으로 알렸던 박종세아나운서는 그날 새벽 당직이었다고 한다. 총성을 듣고는 인민군이 쳐들어온 줄 알고 숨었다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면서 누군가가 『박종세씨 계십니까』라고 하기에 『북한 인민군은 아니구나』라는 안도가 생기더란다.
5.16주체 군인들에게 이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박정희 소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나, 박정희요』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 자리에서 박소장은 박아나운서에게 혁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박세종씨는「혁명을 일으킨 이 긴박한 순간에 나한테는 그런 설명을 안해도 되는데…」하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박소장이 워낙 열의를 가지고 진지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아, 이분이 적어도 혁명공약을 낭독할 사람은 그 뜻을 납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박소장의 부하들은 군 방송요원으로 하여금 5.16거사 방송을 하도록 하자고 건의하기도 했으나 박소장은 『국민들의 귀에 익은 목소리를 통해 알려야지 믿을 것이다』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육여사 피격 현장, 5.16의 현장등에서 나타난 대담함 속의 세심함이야말로 박대통령의 진면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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