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던 옛 현인들은 '인간은 원래 정직했다'고 봤다. 일찍이 공자는 “인간의 천성은 원래 정직한 것이니 정직하지 않고도 생존하는 이는 요행으로 처벌을 면한 것 뿐”이라고 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역시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라고 했다. 지금 진실게임으로 번지고 있는 윤창중과 이남기의 공방전은 공자의 말씀대로라면 누군가는 정직하지 못하면서도 재수 좋게 살아왔다는 말도 된다.
민주국가는 여론정치가 그 축이다. 여론은 국민의 응집력을 만들고 이는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된다. 여론과 비난은 다르다. 여론은 창조적 대안을 유도하기 위한 생산적인 비판이지만, 비난은 비난으로 이어지는 파괴적인 속성을 지닌다. 비판은 지각과 창조적 의도가 깔려져 있지만 비난은 부정의 윤리만을 승수한다. 따라서 비판과 비난이라는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고 가려내야 하는 기술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질문법이다. 책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왜?'라고 묻는 방식이다. '어떻게'라는 질문법은 흥미라는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켜준다. 반면에 '어떻게,어떻게'라고 끝없이 반문해도 그 본질에 이르기 쉽지 않다고 했다. 이 질문법은 수평적이어서 현상만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윤창중과 이남기의 진실 공방전도 그 연장선에 있다.
반면에 '왜?'라고 묻는 질문방식은 본질에 이르고 싶은 인간 본성에 의한 보편적인 방법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왜'하고 거슬러 오르면 자연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구조와 만남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수직적 사고 구조는 가짜로 둘러싸인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속의 진실 혹은 본체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 두 사람의 진실 공방전에도 이런 질문법이 필요한 것이다.
예컨대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사업에 부도를 내고 자살했다고 치자. 여기서 '어떻게?'라고 묻게 되면 사장의 슬픔이라는 현상만 극단적으로 과장될 뿐이다. 하지만 '왜?'라고 묻게 되면 그 회사의 문제점부터 국가 경제의 구조적 모순까지 이른다. 결국 '어떻게?'라는 질문법이 자칫 본질을 가리는 마취적 효과를 뒤따르게 한다면 지금 이남기와 청와대는 '왜?'라는 질문법으로 스스로 묻고 '책임'으로 대답해야 한다.
한편, 이 문제도 짚고 가야 한다. 대통령은 밤새워 연설 준비하고 있을 때 대변인이 어린 여(女)인턴과 술자리를 할 수 있는가? 지금 업적을 노려 야망 찬 계획을 세우기에는 여러 갈래에서 꼴들이 어지럽다. 꼴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원인은 안에 있다. 누가 앞장 서고 누가 뒷장 서는가 문제가 아니다. 전체의 꼴이 되느냐 안되느냐에 있다. 정직해라. 그들만의 파워게임으로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만들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