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쉽고도 어려운 난제 앞에서 나의 삶은 무엇인가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왜 쉬운 진실을 두려워 해야 하는가?
아니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나는 여기에서 과연 진실이란 무엇이며 무엇때문에 진실하지 않으면
우리 삶이 황폐화 하는 것일까에 대해 처연하게 고민하고 싶었다.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기독교복음 침례교 속칭 구원파는 악마였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우리가 진실 앞에서 부끄럽고 어른이 된 것이 미안하고
죄송하다 말하고 흐느끼던 진실함이란 말과 또 진실해야 하는 것과
진실하다는 것은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서로 틀리다는 사실부터 깨달아야 했다.
썩어 문드러진 종교, 기독교나 불교나 그 교리 속 사랑이니 자비니 하는 진실이란 용어 자체가 추상적이서
이 추상적인 용어에서 우리의 인식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자기 합리화를 꾀하기에 진실을 두려워 한다는 것이 인간심리학적 철학의 근거가 비극적이다.
그런데 진실과 합리화란 또 무슨 괘변이란 말인가?
진실을 가장한, 그러니까 진실처럼 보이기 위한 포장을 통해
진실하고 진실해야 하는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두려움이 토해낼 수 밖에 없는 저항성을
우리는 또 다른 하나의 진실이라 착각하게 된다는 사실이 두렵다.
맑은 물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이 맑은 물을 가리켜 쉽게 진실한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지만
이 맑은 물을 이용하여 붉은 색갈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그 붉은 색 자기 합리적 인식을 진실이라 한다면 이를 처음 맑은 물이 진실한 것으로 바라본 사람에겐
붉은 색은 진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사실임을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철학적 근거란 맑은 물을 가리켜 표현되는 말이
사람의 생각을 뒤따라서 인식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진실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외부적인 충격이나
교육같은 것으로 부터 암묵되는 일정한 방향에서 붉은 색을
진실이라 드러내고 이를 또 특수하게 해석하고 표현하면서
현실에 있어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또 한편으로 이와 같은 사회적 이해관계가 그 실체로서 동일성을 이룩하게 된다면
이것은 진실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의미를 갖게 된다.
문제는 사회적 이해 관계이다.
진실을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인 이해 관계란 무엇일 것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 학습과정을 통해 배워온 바 진실에 대한 실체적
언어교육이 우리 삶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신하고 가볍게 취급해온 것이 사실이다.
위대한 교육방법이란 없다. 그러나 거듭되는 반복 교육을 반대하는
이른바 맞춤형 교육은 말보다는 행동을, 행동보다는 실체적인 사실을,
실체적인 사실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우선시 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일컬어 입놀림에 알맞으면 그것이 곧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비록 이 입놀림이 피상적이고 경솔한 것일지라도 윤리적인 태도는 배타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한 직관 보다 애매함과 불확실함이라 하더라도 정확한 인식과정은 생략되면서 여론화로 상징되는
인식과정에 따라 기초적인 사유와 진실이라는 표현을 무시해 왔다.
여기에서 진실이라는 교육은 언어교육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물을 표시하고
표현하는 하나의 잘못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질 수 없는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우리 사회적 관심 또한 새로운 원칙이 생겨났다.
진실이란 교육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객관적 묘사이며 이는 교육으로 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관찰하면서
분명한 정의를 내려야 하고 사물자체를 직관적으로 제시할 때 발생하는 하나의 정의이며 그 이름에 따라
진실이라는 것을 추가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학적 배경은 아주 당연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분명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조금 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논리는 잘못된 인식론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일방적이고 그릇된 이해 위에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진실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우리 삶 속에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관계에 있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실이 먼저 있고 이에 뒤 따라서 무엇이 있고 하는 일방적인 선후관계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진실은 어떻게 해석을 통해 특정하게 나타나거나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이고 통시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말을 잘하는 것을 보면서 이 어린 아이들이 말을 만드는 것이라 착각한다면
참으로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린 아이들은 말을 배우면서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언어의 진실한 세계속에서 자라난다.
어린 아이들은 진실을 습득하듯이 언어를 습득하면서 그 진실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진실과 어린 아이의 관계는 반대로 뒤집혀 진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삶의 세계는 그 삶에 있어 이해를 위한 통로를 열어 주는 진실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서 왜 우리가 진실을 두려워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어린 아이를 통해 비유코자 하는 것도 인식이란 얼마나 인간을 위험하게 하는 도구인가를 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통속적이긴 하지만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게 될때 저것은 무엇이다.
이것은 무엇이다. 말할 때 이름으로 부터 배우게 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게될 때 쯤이면
아이는 벌써 우리 삶 속에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의 줄거리 속에서 말을 익히고 알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진실이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진실을 피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정한 모습이나 행위, 그리고 행태로 부터 나타나는 행동의 틀들이 진실을 과장하거나 가면을 덮어 쓰고
유동적인 무형의 현상 앞에 제시될 때 그 현상의 틀이 사회적인 모습으로 실현되는 되는데 있다.
진실한 인간의 삶은 외부적인 이해의 세계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내면적인 정신의 세계를 이룩하기도 한다.
가장 부도덕한 인간 집단이 도덕 집단화 하고 있으며 가장 부패한 집단이 선한 집단이 되고 있으며
가장 비루한 집단이 성공한 집단이 되고 있으며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자유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이끌려 가야 하는 여론주의야말로 진실을 두려워 하게 하는
현실이라 해도 다름 아닌 것이기에 거짓말로 시작된 구원파 집단은 단죄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