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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일에 최고인 사람을 존경하는 세상이 왔으면.

작성자:

탈존

조회: 4971 등록일: 2017-05-05

내가 어렸을 때는 무엇을 하든 대장이 되고 싶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었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무슨 소년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대장노릇을 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동네 꼬마대장으로 위세를 부리면서 이웃 동네 꼬마들과 나무작대기 칼싸움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잘났다고 자랑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가 아니라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으로 전방 시골동네 대장노릇을 할 수 있었으니 결코 자랑거리는 아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 부대 따라 시골에서만 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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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학생이 되고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워낙 가난해졌기에 그랬던 것일까, 대장이 되는 일에 관심을 잃었다.
학급반장을 하라고 친구들이 등을 떠밀어도 막무가내로 거절했고 특별활동그룹에서 회장을 하라 해도 관심이 없었다. 대장은커녕 신문배달에 가정교사라도 한탕 더해서 당장 밀린 학비를 내는 것과 주린 배를 채우는 게 급했던 거다.
물론,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장차 높은 직위에 오르거나 장사라도 해서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지만 웬일인지 내게는 그런 희망이 오래 머물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극심한 굶주림과 끊임없는 학구열의 틈바구니에서 정신적인 혼란을 겪으며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들었었고 그 와중에 싹튼 염세의식厭世意識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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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과는 달리 나이를 먹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명리를 탐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운이 좋았었는지 승진도 거듭했었어도 실무에 남고 싶은 마음이 커서 정책을 다루는 직급으로의 승진을 반기지 않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에 국제교류분야 업무를 맡아 일 년에 6개월은 해외출장으로 보내는 경험을 얻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켰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외국인들의 가치관과 나의 다름에 문화충격을 느꼈었고 그를 극복하면서 아직도 인간성을 지닌 그들이 부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에게 돈만이 최고요, 권력만이 최상의 가치인양, 인간성이 사라지고 있음에 그들이 부러웠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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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출장 갔을 때, 나를 안내했던 일본국제교류기금日本國際交流基金 직원을 따라 들어간 우동가게에서 동경대학출신이며 직장에서도 전도가 양양하다는 그 친구가 우동가게 주인에게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그 집에 드나드는 손님 거의 모두가 주인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더란 거다.
“저분이 3대 째 이 우동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대학에 다니는 저분의 아들도 학교가 끝나는 대로 이곳에서 우동조리를 배우고 있지요.”
주인 아들은 제법 이름 있는 대학에서 영양학을 전공한다고 했던가.
나를 안내해준 직원은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대통령이거나 국회의원, 고위관원, 혹은 대 재벌이 아니더라도, 비록 우동가게 주인일지언정 우동을 가장 맛있게 끓일 수 있는 장인이라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고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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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끝내고 귀국하여 직원들에게 출장보고회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친일파라 일본 놈들을 칭찬한다는 비난이 들리는 바람에 고소를 금치 못했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일본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예의바르게 처신하도록 엄격한 가정교육을 한다지만 그건 가정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장인들을 예우하는 사회풍토가 조성될 수 있으려면 사회구성원 모두의 인식이 얼마나 높은 직위를 얻었느냐 보다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가치관의 기준을 두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청년이라도 사회적인 가치관이 직위고하와 경제력에 우선하는 사회라면 우동가게 주인에게 존경을 표하는 젊은이들이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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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산골에 정착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이 지닌 자질을 무시한 채 영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이외로 많아 놀란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과 특성이 있음에도 무조건 대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하기에는 어쩐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장이란 각 분야의 최고가 아닌, 남들 위에 군림하는 대장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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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놀라워하는 것은 대학진학을 앞둔 고3 수험생들 중에 상당수가 전공학과를 선택하지 못하고 눈치지원을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고3이 되도록 전공학과까지 정하지 못한 학생이 굳이 대학진학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라도 무조건 대학진학부터 하고 보자는 의식의 저변에 대장이 되고 싶은 잠재의식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우리나라가 학벌주의사회기에 그런 걸까.
태어나면서부터‘이담에 뭐할래?’라던가‘넌 무엇이 될래?’라는 질문을 받았으며 이미 초등학교부터 스스로 선생님이든 대통령이든, 아니면 엔지니어든, 화가든 나름대로의 미래를 꿈꿨던 우리 세대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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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당시에는 전공할 학문이 없으면 굳이 진학하기보다 고교 졸업 후 바로 직업을 얻어 사회로 진출하는 것이 당연했었다. 실재로도 내가 자란 도시에는 공업고교가 없어서 서울공고 자동차과로 유학하여 졸업 후 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보다 근본적인 자동차공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뒤늦게 공대를 진학한 중학교 동창생이 있다. 그 친구는 대장이 아닌 최고가 되고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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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장이 아닌 중간간부로 직장생활을 끝낸 사람이다.
나의 자질이 그 정도에 불과했는지는 모르겠으되 오히려 중간간부였기에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일에 대한 욕심, 혹은 성취감이 지나쳤던 것으로 보면 기관장보다는 중간간부가 내 체질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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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구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며 난리들인 것을 보며 그래도 우리 사회에 대장이 아닌, 최고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루저라고 부를 것인가.
남이야 뭐라 평가하든 유능한 사람일수록 대장보다는 참모를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기도 하다.
사회적인 지위의 최고가 아닌, 자기 일에서의 최고, 즉 참모가 되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적 기초가 든든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대를 이어 경영하는 떡볶이 집 아저씨를 존경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지었음에도 밭을 갈아엎는 세상이 아닌, 국민 모두가 그런 농민을 존경하고 신뢰하기에 그가 생산한 작물을 찾아오는 그런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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