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뜻 책상 앞의 달력을 보니 사흘 후면 포도가 제철이고 오곡백과가 여물기 시작한다는 24절기 중 15번 째 절기인 백로(白露 9/8일)다. 백로부터는 밤 기온이 떨어져서 길 위에 맑고 하얀 이슬이 맺힌다고 白+(雨+路)로 白露라 했으니... 본격적인 가을을 뜻하는 표현과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백로부터는 떨어진 과일도 먹을 수 있다고 낙과줍기도 시작되는 절기다. 문득 나의 어린시절 백로지절에 뛰놀던 추억이 떠올라 그 때 그 시절을 그려본다.
어린 시절 백로가 되면.....
이른 새벽 보구리나 양푼을 들고 떨어진 감을 줍고, 대추나무 밑에서 떨어진 대추를 주웠다. 남의 감나무나 대추나무라도 울타리를 넘지 않으면 누구라도 떨어진 감, 대추, 밤은 줍는 사람이 임자였다. 홍시가 된 감이나 빨갛게 익은 대추는 그대로 주워 먹기도 하고, 먹고 남은 홍시나 익은 대추는 집에 가지고 와서 동생들과 나눠먹고, 덜 익은 떫은 땡감은 칼로 저민 후에 소금물에 담가 우리면 2-3일 후에 떫은 맛이 가시고 그 맛은 달디 달았다. 또한 풋대추는 단맛이 덜 든 것들은 씻어 밥에다 쪄먹기도 했다. 내 어린시절 초가집이 옹기종기 40여 호 모여 있던 고향 마을 백로 절기엔....
산언덕에 숱했던 밤이야 떨어지는 대로 주워 나무꼬치로 송이를 벌려 덜 익었어도 하얀 겉껍질과 속껍질을 벗기고 현장에서 먹어치우고, 아람으로 바람에 떨어지는 윤기 나는 암갈색 알밤과 도토리는 열심히 주머니가 터져라 주워다가 모아두는 옹기에 모았다. 오면 가면 줍고, 새벽 일찍이 동트기 전에 줍고, 바람이 세게 분 날엔 동트기 전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도토리나무와 밤나무 밑을 돌면서 줍고....주워 모으는 도토리와 밤이 늘면 늘수록 재미도 더해 갔다. 백로에서 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까지 열심히 주워 모으면, 도토리는 서너 말이 되어 도토리묵을 쒀먹고, 밤은 보관했다가 재삿상에 올리기에 충분했다.
그 뿐인가?
백로가 지나면 들판의 메뚜기, 왕아치(방아깨비), 소금쟁이...등 땅개비들도 살이 올라 여물어 잡아서 구워먹기 시작하는 절기며, 밭의 동부나 이른 콩도 몇 포기씩 뽑아 또래들이 어울려 마른 나무에 불을 피워 구워먹는 콩떼기를 시작하는 절기였다. 아련히 떠오르는 봉희네 밭둑에 양쪽으로 벌려섰던 아름드리 대추나무들, 문신네 숲을 이룬 대접감, 창동감, 뾰조리감까지 여러 감나무들, 준상이네 밤나무들과 풍성하던 과일 생각에 입안에 가득 군침이 돈다.
백로(白露)에 이렇게 시작된 낙과줍기, 땅개비잡기, 콩떼기는 추분-한로-상강까지 한 달 반 동안 맛이 더 들고 더 여물어져서 재미를 더하다가, 벼 베고, 콩 뽑고, 감 따고, 밤 털고, 도토리 터는 첫서리가 내리는 상강(霜降)까지 가을 한철 즐거운 어린 날의 놀이였고, 배부름이었으며,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었다.
마른 나무에 구워먹던 콩떼기, 살 오른 가을 찰머구리(개구리) 뒷다리와 메뚜기를 생각하면 매케한 연기를 생각하며 눈에 눈물이 흐르니... 이 눈물이 상상 속의 매캐한 연기에 흘리는 눈물인지? 하염없이 지난 세월의 허망함에 흐르는 눈물인지? 변하여 잃어버린 고향 산야의 모습에 아쉬워 흘리는 눈물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