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제주 4.3의 왜곡
권희영(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머리말
제주 4.3은 6.25보다 먼저 시작하였고 6.25보다 나중에 끝난 이념 전쟁이었다. 인민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인민공화국을 세우려는 세력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세우려는 세력 사이의 일대 혈전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소련의 괴뢰국가를 세우려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공산당을 인민민주주의 정당으로 바꿀 것을 지시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한반도에는 각각 북조선 노동당과 남조선 노동당이 조직되었다. 스탈린이 전면적으로 공산주의를 내세우기 보다 인민민주주의를 내세운 이유는 농업 위주의 사회인 한반도에 공산주의의를 전면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직 미성숙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농민-인텔리겐챠의 연합에 의한 정권을 세우는 것을 당면과제로 보았다.
한반도의 북반부를 장악한 소련은 북한에서는 거침없이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핵심으로 하여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비협조세력을 협박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권력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은 스탈린과 소군정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소련은 남한에 대해서는 임의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다. 남한은 미군정이 통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 한민당, 임정 세력이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소련은 남한의 반공 세력을 분열시키고, 박헌영의 공산당 세력을 핵으로 하고 남로당을 만들고,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의 인민민주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남한의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유엔에 의한 한반도 총선이 결정되면서 결정적인 기회가 제공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유엔 감시하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권력 장악이라는 불확실성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북한 지역에서의 총선을 거부하고, 남한의 인민민주주의 동조 세력들로 하여금 총선을 반대하도록 하였다. 인민민주주의 세력은 급하게 한반도를 적화하려고 벼랑 끝 전술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48년 ‘2.7 총선반대폭동’이었다.
제주 4.3은 바로 ‘2.7 총선반대폭동’의 과정 중에 일어나 그 대미를 장식한 사건이었다.
2. ‘2.7 총선반대폭동’, 전라남도, 제주도
1948년 2월 6일 유엔한국인시위원단이 소련의 총선 거부와 유엔 소총회 협의를 발표하자 다음날인 2월 7일 곧바로 파업, 시위 등 총선반대의 선전선동에 들어갔다. 남로당이 내건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인에 맡겨라
4. 국제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라
5. 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6. 노동임금을 배로 올려라.
7.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8.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2월 26일에 유엔소총회는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결정하였는데, 이 때부터는 선전선동에서 폭력으로 본격적으로 그 방향이 바뀌어갔다. 경찰서 및 면사무소 습격, 우익에 대한 테러 등 폭력행위가 본격화한 것이다. 이러한 ‘2.7 총선반대폭동’에서 전남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8년 3월에만 전남 2부 14개군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폭력의 대상은 경찰지서, 우익 단체 및 우익 인사였고 폭력의 도구는 돌, 곤봉, 죽창, 도끼, 일본도, 휘발유, 다이나마이트였으며 총과 탄약 역시 탈취하였다. 사망자와 부상자도 다수 생겨났다. 남로당은 급히 폭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유격대, 백골단, 인민청년군 같은 무장조직을 4월 1일부터 편성해나갔다. 4월의 공격대상은 선거등록사무소, 우익, 지방관리였고 경찰서를 습격해서 총과 탄약을 탈취했다. 여러 테러 행위가 일어나 사상자 역시 다수 발생하였다. 이같은 폭동은 전남 전역에서 일어났다.
전남 전역에서 남로당이 주도하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남로당 전남도당이 관할하는 제주도에서 같은 종류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전남도당이 ‘2.7 총선반대폭동’의 일환으로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개시한 시기는 전남과 거의 동시라고 볼 수 있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2월 9, 10, 11일 밤, 제주 지역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동한 17건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폭동을 유형별로 보면 6개의 경찰지서 습격, 삐라 살포, 칼과 곤봉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시위 등이었다. 주목할 점은 많은 폭도들이 소련국가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보고된 사망자는 없으나, 경찰 2명이 심하게 구타당했다. 경찰은 3일 동안 약 290명을 체포했다”고 기술했다.
3월에 들어가서 폭력사태가 전남도당 관할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때 전남도당은 제주도에 규모가 큰 폭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한다.
도상위는 3월 15일경 도(道) 파견 ‘올구’를 중심으로 회합을 개최하여 첫째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둘째 단선‧단정 반대 구국투쟁의 방법으로서 적당한 시간에 전도민을 총궐기시키는 무장 반격전을 기획 결정하였다.
즉 남로당 전남도당의 오르그의 지도하에 무장 투쟁을 결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날 이후 남로당 제주도 위원회는 폭동 준비를 시작하였다. 3월 28일까지 13개중 8개 읍면에서 유격대, 자위대, 특경대 320명이 편성되었다. 거사일은 4월 3일로 잡았다. 남로당이 이같이 무장봉기를 결정하는 것에는 제주의 경비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 사정을 『보고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4월 3일을 거사일로 잡은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위원회는 제주읍내 경찰감찰청과 제1구경찰서는 경비대 병력을 동원해 점령하고 도내 14개 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원들이 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제주도당에서는 모슬포 소재 경비대 제9연대에 4명의 조직원을 침투시켰다. 이 가운데 2명은 중도에 이탈했으나, 2명은 ‘프락치’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전에 프락치를 접촉, 제주경찰감찰청 등의 습격작전에 경비대원 동원 가능성을 타진하자 그 프락치는 9연대 전체 병력 800명 중 400명은 확실성이 있으며, 200명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고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서 하사관과 합하여 18명이니 이것만 숙청하면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러나 9연대에는 차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동차 5대만 보내주면 좋고, 만약 불가능하다면 도보라도 습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4월 3일 당일 경비대 동원은 실현되지 않았다. 도당 파견원이 자동차 5대까지 준비해 갔으나 9연대 프락치를 접촉할 수 없었다. 수소문을 해봤더니 프락치 2명은 영창에 감금되어 있었다.
경비대를 동원하려는 계획은, 프락치가 사전에 검거 되어 연락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9연대 병력의 절반을 남로당이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남로당이 무장반란을 기획하는 동기로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보고서』가 인용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파견원이 최후적 지시를 가지고 국경(國警) 프락치를 만나러 갔던 바 프락치 2명은 영창에 수감되어 없었음으로 할 수 없이 횡적으로 문상길 소위를 만났던 바 이 동무의 입을 통해서 국경에는 이중 세포가 있었다는 것, 그 하나는 문 소위를 중심으로 해서 중앙 직속의 정통적 조직이며 또 하나는 고승옥 하사관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출신 프락치로의 조직이었음.
그래서 4‧3 투쟁 직전에 고 하사관이 문 소위에게 무장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된다고 투쟁 참가를 권유했던 바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고 거절한 바 있었다고 함.
이 말을 듣고 도 파견 국경 공작원은 깜짝 놀랐으나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수 없으니 제주도 30만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또한 우리의 위대한 구국항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어코 참가해야 한다고 재삼 재사 요청하였으나 중앙 지시가 없음으로 어찌할 수 없다고 결국 거절당했음. 이리하여 4‧3 투쟁에 있어서의 국경 동원에 의한 거점 분쇄는 실패로 돌아갔음.
즉 남로당이 ‘2.7 총선반대폭동’을 지시하고, 남로당 전남도당이 모험주의적 폭동 실행을 기획하고, 전남도당 산하 제주도당이 폭동을 실행한 것이 바로 제주 4.3인 것이다.
3. 2013년 검인정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4.3서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고 소련의 괴뢰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남로당 최후의 모험주의적 폭동이 4.3이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 남로당이 벌인 최초의 모험주의적 폭동이 제주 4.3과 관련된 여순반란사건이었다.
이같은 제주 4.3을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은폐와 왜곡이다.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4.3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제주 4.3의 기점에 대하여
현행 검인정 교과서 8종 중 4종이 제주 4.3의 기점을 엉뚱하게도 1948.3.1.을 기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1년여 이전인 1947년 3.1로 잡고 있다. (미)(천)(두)(비)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1947.3.1.의 행사는 박헌영 체포령 철회가 주 요구사항이었다. 5.10 총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2) 1947.3.1.절 기념 행사의 주최
다수의 교과서들이 수상하게도 남로당이 주관한 제주 1947.3.1행사가 남로당 및 그 산하 좌익 단체라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미)(천)(두)(비)
3) 3.1절 기념 행진의 불법적 성격
미군정이 3.1 기념집회는 승인하였으나 시위는 미군정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것을 은폐하고 있다.(미)(천)(두)(비)
4) 경찰 발포의 원인
경찰이 어떻게 발포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다수의 교과서가 은폐하고 있다. (미)(천)(두)(비)
『보고서』에서도 명백하게 언급하였듯, 경찰의 발포는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한 것이다. 따라서 경찰의 고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익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제주도민을 선동하려 하였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이런 좌파세력의 움직임을 배후에서 주도해 갔다”.
5) 4.3 무장폭동 주체 모호하게 서술
다수의 교과서들이 4.3무장폭동의 주체를 모호하게 서술하였다. 남로당이라고 적시하지 않은 것이다.(미)(천)(두) 어떤 교과서는 4.3폭동세력이 우익을 학살한 사실을 은폐하고 습격이라고 표기하였다.(천) 어떤 교과서는 총선반대 시위의 일환으로 4.3을 묘사하였다.(지)
6) 선거는 실시되었으나 제주도 2개 선거구에서 선거무효를 선언한 것을 가지고 선거 미실시라고 왜곡하였다.(미)(천)(두)(리)(비)
7) 어떤 교과서는 총선방해로 인해 선거무효가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미군정은 무력진압을 시도했지만, 3개 선거구 중 2곳에서 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다”고 남로당이 승리한 듯 왜곡하여 묘사하였다.(미)
8) 어떤 교과서는 여순반란 사건도 무장봉기로 미화하였다.(미)(두)(리) 여순 반란군을 반란군이라고 서술하지 않고 “군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두)
9) 어떤 교과서는 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왜곡하였다.(미) 민간희생자가 진압군 때문에만 일어난 것으로 묘사한 것고 있다.(두)
10) 여순반란 폭도 진압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로 왜곡한 교과사도 있다.(미) 여순반란 사건시의 구호 ‘인민공화국’은 은폐하고 ‘통일정부수립’만 내걸어 정당성 있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두)
11) 제주 4.3희생자들의 수치를 2만5천-3만으로 정확하지 않은 숫자를 표시하였다.(미)(천)(두)(리)(비)
12) 폭도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해 가해자를 은폐하고 국가 권력을 가해자로 서술하기도 했다. (미)(천)(두)(지)
13) 폭도들을 군경처럼 “전투원”이라 하여 교전단체원으로 묘사하기도 했다.(두)
교학사 교과서는 4.3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948년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남조선 노동당이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단독 총선을 거부하도록 지시하면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들과 우익 인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제주 4·3 사건).
한편, 제주도의 봉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여수 주둔 14연대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14연대 내의 남로당계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들은 여수를 장악하고 인민 재판소를 설치하여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였다. 반란은 순천 지역까지 확대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여수·순천 10·19 사건). 이후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남한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하였다.
4.맺음말
이상과 같이 볼 때, 교학사 교과서 외의 다른 교과서들은 4.3의 실상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과서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보다도 더 심하게 4.3이 왜곡되어 남로당의 죄악을 은폐하는 방향으로 서술되었다. 따라서 한국사 교과서를 읽고나면 4.3의 비극을 일으킨 범죄자가 남로당이 아니라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인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 식의 교육은 지체 없이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