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을 하고 싶은데 어떤 농사를 지을까? 고민하시는 분이 계시면, 귀농3년차 선배(?)로서 조언 드린다면 일단 손이 덜 가는 농작물을 택하라는 겁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콩 등이 있을 겁니다. 이상은 다른 농작물에 비해 손이 훨씬 덜 가기도 하지만 2모작이 가능합니다. 물론 손이 덜 가는 만큼 비례하여 소득은 낮습니다. 그러나 귀농하자마자 농사를 지어 본 경험도 없이 고소득 작물을 선택해서 쫄랑 망하고 난 뒤 농사지을 게 되니 못 되니 하는 거보다야 안전 빵이고, 한2-3년 이웃과 친목도 다지고 호형호제 하다보면 없던 정보도 튀어 나오고, 그때는 정말 제대로 된 영농을 시도해 보라는 겁니다. 저는 작년엔 옥수수를 선택했고 올 핸 고구마와 콩을 선택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영농이 아니라 땅을 놀릴 수 없으니 시험 삼아 해 본 것입니다. 생각한 만큼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웜업(warm up)인 거죠. 아이고! 아이고! 이거 엄한 소릴 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먹을 만치 옥수수를 심었다.
작년에 옥수수를 많이 심었습니다(영농 차원은 아니고...).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요. 삼남매, 친지 이웃 등에 퍼 주고도 남는 겁니다. 먹고 먹어도 남는 겁니다.

손바닥이 아프도록 까서 말리기도 하고...

그냥도 말려 보고...

쪄서 먹고, 구워 먹고, 뻥튀기도 해 먹고, 먹고 먹고 또 먹어도 남아도는 옥수수. 그래서 옥수수에 맺힌 한을 충분히 풀었다.
아래 썰은 좀 지난 썰입니다. 그제 우연히 어떤 벗님의 블로그에 갔다가'옥수수'에 관한 음식과 글을 보고 불현듯 이 썰이 생각나 구석에 아무렇게 굴러다는 놈을 다시 꺼내 올립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독자 제현의 깊은 양해를 부탁드리오며....
한(恨)많은 옥수수
지금은 없어졌지만 정부종합청사 뒤쪽 종로구 내자동엔 자그마한 내자호텔이라고 있었습니다. 9.28수복일 중앙청에 자랑스런 태극기가 오르기 전 인민군 마지막 잔당은 그 내자호텔에 은폐하여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놈들의 아지트였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인민군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국군은 그곳을 향하여 박격포를 날렸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중의 한 발이 내자호텔 뒤쪽에 자리한 저희 집으로 날아와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6.25가 발발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저희 가족은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나기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뜻밖에 박격포 탄이 먼저 날아와 버린 것입니다. 불행의 그 한 발 박격포 탄으로 어머니는 왼팔을, 당시 수송초등학교(지금의 종로구청자리)2년이든 형님은 오른쪽 다리(대퇴부)가 잘려 나갔습니다. 세 살이었든 저 역시 척추 쪽에 파편을 맞았다고 하는데 이날까지 아무런 이상이나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 잔혹 사를 얘기 하려는 게 아닙니다. 불행은 또 다른 불행을 낳는다죠? 그로인해 장애자가 되 버린 나이 어린 형님은 차치하고라도....불행했던 집안 얘기 좀 해야겠습니다. 저희 조모님께서 보통분이 넘으셨습니다. 왼팔 없는 며느리를 학대하며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켰습니다. 한 쪽 팔 없는 며느리의 살림살이는 해도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조모님은 저희를 끔찍이도 귀여워하는 게 아니라 미워했습니다. 며느리는 미워도 손자손녀는 그렇지 않으실 텐데 저희 형제들을 뱀 보듯 냉정하셨습니다. 심지어 다리 없는 착하디착한 형님에게“그 때(폭격) 죽었어야 하는데...”를 입에 달고 다니셨습니다.
피난지의 저희 집 담장 안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었고 그 텃밭에는 우리 가족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남새가 철철이 언제나 자랐습니다. 더불어 감나무. 돌배나무. 호두나무. 살구나무. 앵두. 자두. 포도넝쿨 등등의 유실수도 있었고 특히 여름철이면 옥수수를 늘 심었기에 그 옥수수 대가 담장 노릇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얼마나 목가적인 분위기입니까. 옥수수가 익을 무렵이면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죠. 그리고 포도도 거뭇거뭇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옥수수가 익어가고 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은 저와 형님은 수난의 계절이 되는 겁니다. 조모님은 어머니를 통하여 그 옥수수와 포도에 절대 손을 못 대도록 엄명을 내립니다. 그것은 연례행사나 다름없었고 저희 형제는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하고 결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가끔씩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가 참 천연덕스럽고 일찍 철이 들었었어...”라고. 할머니가 그토록 매년 엄명을 내리며 아끼든 옥수수와 포도의 쓰임새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제게는 저 보다 한 살 많은 사촌 형이 있고 또 한 살 아래인 고종사촌이 있습니다. 둘 다 외지에 살았기에 방학이면 저희 집으로 모두 옵니다. 사촌형은 작은 아버지의 장남이었고 작은 아버지는 국책은행(산은)의 중간간부쯤 되셨으니 꽤 유복한 터였고, 고종사촌 또한 유복한집안의 4대독자로서 금이야 옥이야 길러지든 놈이었습니다. 아~! 또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시집 안 간 과년한 막내고모가 있었는데, 이 여인네가 팔 없는 올케에게 시집살이를 가중시키는 그야말로“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역할을 단단히 하는 그런 고모가 있었답니다.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중국의 호텔 뷔페 식단(호텔 비에 포함 된 조식)은 지방에 따라 대동소이 합니다만 어떤 호텔의 식단이든 똑 같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만두(딤섬 포함)종류와 삶은 옥수수가 그것입니다. 저는 식사를 할 때 마다 꼭 옥수수 한 덩이를 접시에 담습니다. 그리곤 지난날을 회상하며 다른 어떤 음식보다 먼저 천천히 음미하며 먹습니다. 일종의 눈물어린 옥수수인 셈이죠. 한 번은 사촌형이 빠진 사촌형 식구와 저와 제 마누라와 중국을 함께 간 일이 있었죠. 다음날 아침 식사 때였습니다.
우연하게 사촌형수가 다른 맛난(?)것들은 제외하고 옥수수를 몇 덩이 접시에 올려놓고 먹는 것을 보고 불현듯 지난날 할머니와 그리고 사촌과 고모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사촌형수에게“눈물의 옥수수”얘기를 해주었답니다. 그런 사정을 듣는 형수는 처음 듣는 얘기라며 깔깔거리고 웃다간 종래 제 눈가의 슬픈 흔적을 발견하고 함께 눈물을 찔끔거리기까지 했답니다. 그리고 제가 과일을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마는 과일 중에 특히 포도를 제일 싫어한답니다. 널브러진 옥수수 대와 마당에 흩어져 있는 포도껍질의 잔상이 뇌리에 아직 남아 있나 봅니다. 손수건 없이는 못 볼 지난날의 얘기를 계속 하려니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아련한 어릴 적 추억입니다마는, 며느리 밉다고 저희 형제를 박대 하시던 할머니도, 고초 당초처럼 매운 시집살이를 하셨던 어머니도, 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역할을 단단히 했던 고모도, 이런 정황에서 우유부단(나중에 철들고 보니....)하셨던 아버지도 이미 이 세상 분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며느리와 그 자식들을 박대하시든 할머니가 어느 날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7년간 대소변을 받아내시며 병간호를 하신 분은 그래도 울 엄니셨다는 얘기를 끝으로 썰을 마치겠습니다.
그런 그들이 한 테 모여 적당히 익은 옥수수를 찌고 포도송이를 따는 모습을 보면 저와 형님은 슬그머니 동구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곤 두어 시간 놀다가 들어와 마당에 널브러진 옥수수 대와 포도껍질을 바라보며 입안에 고이는 침을 그들에게 들킬까 겁내하며 조용히 삼키곤 했답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는 우리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으며 먼 뒷날 제게“너희가 참 천연덕스럽고 일찍 철이 들었었어...”라는 말씀을 가끔씩 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