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장모님이 작은 아들에게는 체면이 서지 않고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문경에 있는 큰아들에게‘나 좀 데려가 다오! 이젠 그곳에서 뼈를 묻어야 겠다’는 식으로 SOS타전을 했던 모양이다.
이 썰을 시작하며 언급 했지만….큰처남, 나 보단 두 살 위인 이 인간. 젊은 시절부터 정말 개구신 같은 인간이었다.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허우대 멀쩡한 이 인간 생긴 대로 팔 난봉꾼이었다. 대저 그런 인간들이 그러하듯 악독하진 않지만, 대체적으로 사기성이 농후하고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색잡기에 능한 인간들이다. 이상 열거한 표현 그대로 인생을 살아 온 위인이다. 계집과 바람피우다가 신상이 어려워지면 형제자매들에게 손 벌리기, 내일 틀림없이 갚을 테니 돈 빌려 달라기, 누구로부터 고소를 당했는데 돈 없으면 감방 간다며 형제자매 괴롭혀 돈 뜯기. 아무튼 정말 인생 더럽고 지저분하게 사는 인사였다.
큰처남이 문경에서 살게 된 동기도 워낙 개 같은 생활을 하며 형제자매를 괴롭히기에, 당시 필자가 문경 땅에 전원주택을 지으려고 마련한 부지의 조경공사를 하며 그곳을 감독하라며 알바로 채용하며 머물게 되었는데, 얼마간 생활하며 그곳이 오미자 농사의 본산지이며 농사를 지어 보겠다기에 3천여 평의 수확 가능한 오미자 농장을 임대해 주며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경공사 감독을 하라고 했더니 업자와 작당을 하여 기천 만원 삥땅까지 쳐 간 사실이 나중 밝혀졌지만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 정도로 인간 이하의 개 구신이 큰처남이라는 인사다.
그런 큰처남에게 장모님은 전화로 SOS를 치며‘나 좀 데려가라!’고 하셨는데, 절대 제 어미와 함께 할 수 없는 큰처남이 선뜻 장모님을 모신다고 만방에 선포하고 장모님을 모시고 간 것은 작년 11월 12일이었다. 그렇게 장모님은 큰아들 집에 노후를 의탁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듣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흘이나 나흘이 지났을까? 아내에게 장모님으로부터 하루에 십여 차례 이상의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번엔‘나 여기(문경) 살 수 없으니 나 좀 데려가 다오!’
한적한 산골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내 눈치를 보며 당혹해 하는 아내를 보며 나는 통 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어머니 우리가 모시겠다고 장담 했잖아, 그러니 모시고 오자!’ 아내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이 결정은 오로지 나만의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이 큰처남 내외에게 있었다. 다름 아니라 큰처남 내외는 장모님 수중에 남은 사글세 보증금 1500만 원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이 문제도 이미 산골일기에서 피력한 적이 있음)솔직히 그 돈은 장모님 돌아가시면 장례비로 이용하겠다고 했던 것인데 그걸 탐하는 큰처남이 정말 미웠던 것이다.
썰의 순서가 잠시 바뀌었지만, 큰처남 집으로 내려간 장모님 여전히 큰아들은 물론이고 며느리 되는 사람에게 여전히‘대가리에 똥밖에…’의 타박을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다시 아내에게‘나 좀 데려가 다오!’를 외쳤는데 아내는 아내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즈음 나의 통 큰 결정이 아내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큰처남이 장모님이 남겨 둔 사글세 보증금 1500만 원을 작은처남과 합의(장모님 모시는 조건)를 봤다며 그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요! 그러시다면 그 돈 두 형제가 나눠 쓰되 장모님 저희가 못 모시겠습니다.’라는 한마디에 찔끔하여 긴 얘기 않고 그 돈을 돌려받았다. 그만큼 처남 형제가 장모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처치였던 것이다.
지난 6월 초 장모님을 모시고 제천 시내에 있는 노인병원엘 갔다. 하시는 행동들이 혹시 치매인가 싶어서….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검사를 마친 의사는‘노인들이 늙어가며 있을 수 있는 기억 퇴보는 있지만 치매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려 준다. 장모님은 어제도 그제도 40년 전의(나와 함께 겪었던 일들..)입에 달고 살았던 욕설이나 생활들을 정확히 기억해 내신다. 보통 치매를 앓는 노인들이 오래 된 것은 기억하지만 최근 것은 기억 못한다고들 하는데 장모님은 신구를 막론하고 기억력이 정확하다. 글자는 몰라도 숫자(전화번호) 특히 금전에 관한 백 원짜리 몇 닢도 정확히 기억하신다. 약 보름 전엔 인근 면의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인근 면의 병원으로 가게 된 것도 거주지의 유일한 병원에서 기피 인물로‘가급적 우리 병원엔 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 빙그레 웃으며 내게‘고생 좀 하시겠어요.’란다. 그리곤‘할머니 오래 사시겠습니다.’란다.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고 오갈 데 없는 여인이 혹시 한이라도 맺힐까 내 눈치만 보는 아내에게 통 크게 감동을 선물하리라고 마음먹고 장모님을 문경에서 모시고 온 것은 작년 11월22일 장모님이 문경으로 내려간 지 딱 열흘 만이다.
집과는 300여m 떨어진 곳에 500여 평의 대지를 정확하게 반을 나누어 처형과 처제가 집을 지어 놓고 있다. 처형은 30여 평의 번듯한 집을 지어 놓고 문을 잠근 채,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니다 오는지 모르지만 가끔씩 들리고, 처제는 은퇴 후 내려와 정식으로 집을 짓겠다며 현재는 10평의 원룸을 지어 놓고 격주의 주말이면 한 번씩 내려오기에 집이 비어 있는 상태다.
이미 밝혔지만 내 집의 아래채는 누나와 매형이 거주하고 있던 과정에서 누나만 몸을 빼, 앵두나무 우물가의 처녀들처럼 단봇짐 싸서 서울로 올라갔기에 매형더러 방을 비워 달라고 했었고, 이에 매형은 봄(올 봄)이 오면 방을 비우겠다는 약속을 했던 터라 문경서 모시고 온 장모님은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세간만 챙겨 처제의 원룸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그렇게 생활을 하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모님에 대한 나의 공경심(자식들과 며느리 욕을 하거나 말 거나…), 애틋한 마음, 더하여 극진한 사랑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장모님 계시는 곳으로 문안 인사드리고 혹시 보일러가 제대로 가동이 되지는 않을까, 더운물은 제대로 나오는지, 식사는 제대로 드시는지, 날 잡아 병원에도 모시고 가고, 잡숫고 싶은 거 있으면 사다 드리고, 눈이라도 많이 오면 마당 전부는 아니더라도 다닐 수 있는 길 터주기, 재미난 농담도 하다가 자리에 일어나면 찬바람 맞아가며 사위 잘 가라며 방문을 열어 두고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배웅하시는 모습이 안쓰러워 돌아보며‘추운데 어서 들어가시라!’며 소리 지를 정도로 장모님과 나의 관계는 눈물 날 정도로 짠하고 애틋했었다.
그렇게 혹독한(제천 겨울날씨 보통이 아니다.)겨울을 사랑하는 연인 이상으로 짠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매일을 보내자 춘삼월 봄이 온 것이다. 지난 3월 중순경 드디어 매형(사실 갈 곳이 없었다. 누나와 형식상으로 부부로 살았지만 생활도 따로따로…누나도 단칸방에 함께 생활 할 수 없다며 결국 친구의 집으로 간다는 매형이었다)이 집을 비우기로 한 날짜가 다가오고 매형은 매형대로 분주히 갈 곳을 물색하고 있던 어느 날 아내는 나를 조용히 부른다.“아무래도 안 되겠어….매형 말이야…”그렇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꺼낸 아내의 얘기는, 오갈 곳 없는 시누이 남편을 친정 엄마 모시겠다고 쫓아내면 자신의 마음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단다.
BY SS8000 ON 9. 28, 2016 씀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소음 없이 실내를 쾌적하게 만드는 환풍기로 변신하는 마술
게시물 삭제요청방법
Copyright(c) www.nongak.net
tapng97@hanmail.net
연락처 : 010-4696-7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