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짓는 다는 거.... 부지불식간 짓는 과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죄, 처음부터 작심하고 짓는 죄 등등.... 그 어떤 것이라도 죄를 짓는 것은 나중에 크게 후회하고 마는 것이다. 하기는 죄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은 점도 있다. 가령 헌법상에 명시 되어 있는 즉 실정법에 의거한 것인지, 명문화 되지는 않았지만 불문율을 어긴 죄인지,,,,그러나 어쨌든 명문이든 불문이든 법(인간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도리)를 어긴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일 게다. 결국 죄의 기준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양심이 기준이고 저울일 것이다.
그해는 이미 사업이 거덜이 났었다. 어떻게든 권토중래해 보겠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듯 악화일로였다. 그렇지만 마지막 기회를 뇌이며 독일 프랑크 후르트에서 개최되는 잡화 쑈에 출품하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의 김포공항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의 의자에 앉아 시름(이번 보따리 장사가 잘돼야 할 텐데...하는 절박한 마음의...)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나“오 사장님 아니십니까?”라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어!? 박 과장 이게 어쩐 일이오!?” 그는 분명히 4-5년 보지 못했든 아니 볼 이유가 없었든‘박 과장’이었다.
얘기가 4-5년 전(그 당시)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인천의 某공단 근처에서 제조. 수출업을 하고 있을 때, 그는 某선박(포워딩)회사의 세일즈맨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그 회사에 취직을 한 그야말로 후레쉬맨이었는데 어쩌다 내 공장까지 영업을 하러 왔다가 이런저런 조건을 내세우는 바람에 몇 차례 물동량을 주어보니 참신하게 일을 잘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서비스도 괜찮았다. 결국 우리 공장의 모든 물량을 그에게 의뢰하게 되었고 그와는 거의 3-4년 호흡을 맞추어 일을 했고 그 사이 그도 승진을 하여 과장의 중임을 맡게 되었는데 한창 잘나가는 때는 우리도 그도 신명나게 일을 했지만, 어느 해인가부터 사업이 쪼들리기 시작하자 거의 현금으로 결재하다시피 하던 선임(운임)을 당좌와 어음으로,,,,그것도 결국 나중에는 부도를 내고 말았다.
당시 공장의 상황이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의 이 은행 저 은행 찾아다니며 소위 무역금융을 쓰다 보니 신용장 받기에 급급한 나머지 출혈수출을 하는 지경까지 도달했던 것인데 결국 열심히 수출한 만큼 선임은 불어나고 불어난 선임은‘박 과장’과 그가 몸담고 있는 선박회사의 부담으로 널어나고 말았다. 어쨌든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공장은 1차 적으로 부도가 나고 이런저런 채권자들의 등쌀에 잠정적으로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 썰을 읽는 분 중에 빚을 져 본 적이 있는지....????? 빚을 져보면 옛 사람들의 위로말씀 중에‘빚 없으면 산다.’라는 명언(?)이 얼마만큼 절절하고 절실한지 알 수 있다.(그렇다고 그런 것을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빚을 질 필요는 없고...)그런데 부도가 나고 빚을 져 보니까, 꼭(필히) 갚아야 할 빚과 그래도 느슨한(?) 빚이 구분 되는 것이다
“빚을 져 보니까, 꼭(필히) 갚아야 할 빚과 그래도 느슨한(?) 빚이 구분 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자, 이곳의 이웃 벗'Beacon'님께서 느슨한 빚쟁이가 들으면 씅질 낼 것이라고 하셨지만, 빚이라는 걸 꼭 갚을 의지만 있다면 그게 대수일까 싶다. 사실이 그랬다. 사업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부모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친척. 지인 누구에게라도 달려가게 되는 것이고 결례를 범하는 것이다. 내가 채권은행으로부터 마지막 부채상환통지를 받은 것은 1998년 여름이었든가 그랬다. 그리고 친인척의 빚을 모조리 상황 할 수 있었던 게 그 후로 2-3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었고. 이런 과정이 어쩌면 꼭 갚아야 할 빚의 순서였는지도 모른다.
김포공항의 출국장에서 시름에 잠긴 나를 불러일으킨 ‘박 과장(수인사를 닦고 명함을 교환해보니 그는 이미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여’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은 몇 년 만에 만난 나와 인사를 나누자마자“아이고! 사장님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꺼?”라며 부산사나이 특유의 호쾌한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갔다.
‘박 과장’의 회사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소공동 해운회관에 자리한 일본계 포워딩 캄파니로서 견실한 업체로서 어찌하다보니 나와 거래를 하게 되었고 결국 거액의 부도를 맞게 되었는데, 그의 입장이 보통 딱한 게 아니었다. 그는 정말 성실한 청년이었다. 험악한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그런 청년을 곤경에 빠트린다면 사회에 대한 실망이 얼마나 클까? 솔직히 부도가나 내 앞가림하기도 어려운 놈이 그런 마음을 먹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마는 그러나 왠지 성실한 그 청년만큼은 구제해 주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면‘박 과장’의 회사에 직접 찾아가 그 어떤 부채보다 제일먼저 상환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이곳에 일일이 표현 할 수 없는...)그렇게 함으로서‘박 과장’이 처해 있던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하고 그의 기를 살려준 뒤 사업체를 완전히 접고 나는 잠행을 했으니 그가 나를 찾았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4-5년 흐른 뒤 김포공항의 출국장에서 그를 만났으니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인가 이거다.
잠시 썰의 가닥을 다른 방향으로 몰아가 보자. 내가 어째서 산골일기라며 그것도 부제를‘죄짓지 말자.’라고 외쳤는지부터 알려야겠다. ‘박 과장’과 수인사를 닦은 후 그의 행선지가 나와 같은 독일의 프랑크 후르트 이고 그 역시 전직한 회사의 제품을 그 박람회에 출품하기 위하여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나의 입에서“아이고! 박 과장! 내가 그때 박 과장 회사에 빚을 안 갚고 도망쳤으면 박 과장 입장이 보통 난처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상태로 공항에서 박 과장을 만났다면 멱살잡이에 사기꾼에...난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네...”라는 솔직한 표현은 독일 현지에 도착하여 박람회 현장에서 한 얘기였다. 사실이 그랬다. 그가 공항에서 나를 보자마자 멱살을 잡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만해도 진땀이 송글송글 맺힐 부분이 아닌가. 그러니 어찌 죄를 짓고 도망을 다니겠는가.
오늘날의 나는, 우리 가정은 너무 행복하다. 삼남매 시집장가 다 보내고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의식주가 나름 넉넉하여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이 나이에 중국을 오가며 아직도 보따리장사를 할 수 있는 내가 우리 가족이 행복하다. 그런데 지금의 이 행복이 전부는 아니더라도‘박 과장’과의 재회에서 비롯됐다면 그래도 죄를 짓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