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digest 22-
로마군은 창군이래 오랜 세월동안 싸움터에 나가는 병사들의 武裝은 血稅 개념이 철저한 자기 부담이었다.
그러다가 BC.3세기에 軍裝統一의 필요성 때문에, 지급되는 경비에서 차감은 했으나 국가 부담으로 바뀌었다.
輕步兵은 劍과 投槍에 방패 그리고 간단한 전투모에 胸帶와 군화로서 혁제 샌달이 무장의 전부였다.
끝으로 가면서 가늘어지는 1미터 길이의 투창은 한번 던지면 다시 사용할 수없도록 적군에 꽂히면서 창 끝이 부러지는 1회용으로 적이 주서서 되던질수 없도록 고안된 것이다.
방패는 직경 90센티의 그리스식 타원형이고 전투모와 흉대는 가죽으로 만들었다.
게르만이나 갈리아人보다 키가 작은 로마人이라도 커 보이기 위해 모자에 깃털이나 기타 장식을 하는 것은 重步兵에만 허용되었다.
重步兵은 전위 중앙 후위가 모두 같은 중무장이라고 하지만 中世의 그것에 비하면 빈약했다. 철모를 쓰고 커보이기 위해 거기에 길이 50센티 가량의 깃털 등으로 장식을 한다.
흉대와 등받이는 얇은 철판이나 두꺼운 가죽제이며 脛甲 정강이 싸개도 같은 재질이다.
방패는 1미터 25에서 50센티의 타원형이고 방패를 땅에 세웠을 때 적의 칼로부터 아랫도리 보호를 위해 25센티 폭의 둘레는 철갑을 댔다.
그밖의 부분은 나라오는 돌이나 창 칼의 타격을 약화시키기 위해 곡선을 그리고, 사발을 엎어놓은듯한 모양의 중심부도 그까닭이다.두장의 나무판자를 맞붙인 기본형에 안쪽은 麻布를 바르고 외측은 쇠가죽으로 덧댔다.
검은 BC.205년까지는 가느른 긴칼을 사용했으나 한니발을 처부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스페인 원주민이 사용하는 양날 단검으로 대체하면서부터 자르는 전법에서 찌르는 전법으로 바뀌었다.
창은 던지고 찌르는 두 용법에 맞도록 고안되었다.
기리가 3미터에 사정거리가 25미터라고 史家 폴리비우스는 전하고 있다.
하나의 무계만도 1킬로가 넘는 창은 굵은 것과 가는 것 두자루가 정식 무장이다. 다만 이 중무장은 하스타리와 프린티페스(청년병사)에만 적용했고 後衛 담당의 토리아리(40세이상 장년병)는 창 하나로 족했다.
다음은 로마가 어려움을 겪었던 騎兵 이야기이다.
근대화 전쟁에서 기관총이 나오기 전까지 戰場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고대부터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騎兵隊였다.
그런 기병대가 로마군에서는 크게 크로즈업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장보병이 주력이라고 생각되는 로마군단에서는 수도 적고 전력으로서도 저평가되는 기병이지만 무장이 國費전환 후에도 기병 공급이 부유층계급에 한정되어 있었다는대서 첫째 이유를 찾는다.
말을 탄다는 것자체가 古代에는 어려서부터 몸에 배지 않는 한 습득이 어려운 일종의 특기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로마는 초원이 많지 않은 지형적 조건에서 전쟁목적으로 말사육을 장려하지도 않은 탓이기도 하다.
지금 같은 말안장이 고안된 것은 中世 이후 이야기고 고대는 생말잔등에 타고 두 다리로 힘을 주어 말을 요령것 다스릴줄 알아야 달리기도 하고 전투도 할 수있는 기술이 어려서부터 몸에 익지 않고서는 기병 양성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2개 군단에 겨우 600기 밖에 없는 그런 취약한 기병력은 주로 機動力으로 활용되었다.
騎兵團은 로마의 갑부집 자제들의 '士官學校' 視되기도 했지만 전장에서의 역할은 패주 적군의 추격이나 斥候 긴급 傳令 역할이 주임무였다.
이런 모든 이유는 물리적인데에 있지만, 로마군의 기병 육성이 힘들었던 가장 큰 원인은 로마軍團의 正體性 문제에서 찾아진다.
전통적으로 로마군은 중장보병 중심 군대로서의 정체성을 지녀 왔다.
그 중장보병은 로마시민권자의 중심축인 제1,제2,제3 계급출신으로 이루어지며 그들에 의해 로마는 존재해 왔다.
원로원도 그들 계급에 의해 지배되고 시민집회도 다르지 않았다.
중장보병 중심의 로만군단 전통을 바꾼다는 것은 정체성 부정이기 때문에 한니발에 의해 오랜 세월 유린을 당하고도 참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감수한 로마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수모를 겪고 로마군도 점진적으로 기병 양성에 힘을 쏟아 마침내는 帝政으로 들어와 地中海를 內海로 하는 大帝國을 이루게 된다.
그런 로마군은 어떤 軍律 하에 먹고 자고 행군하고 싸우며 병영생활을 했는지 알아보자.
로마군은 兵站으로 이긴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만큼 전력 유지에 보급은 필수라는 이야기이다.
식사는 특별히 매뉴얼화한 것이 없다. 시민가정에서 먹는 밀가루 빵과 올리브 야채 우유나 양유 그리고 육류대신 생선을 주로 했다고 사료는 전한다.
1일 行程은 완전무장하고 평균 25킬로를 걷고 행군이 끝나갈 쯤에 지휘관 하나가 소대 병력을 이끄로 선발대로 앞서가서 전투단위 2개 군단이면 약 1만명이 한 곳에 쉴수 있는 평지를 찾아 깃발을 꽂는다.
이때쯤이면 후속 본대가 도착하여 일사분란하게 야영 천막을 세운다.
尺(자)까지 동원 않다라도 발로 재고 줄을 쳐서 사각형으로 터를 잡은 야영지에 매뉴얼대로 총사령관용 부관들용 동맹 각군용 야전병원용 취사용 보급창용 그리고 각 소대용 등 막사를 설치하고 한 가운데는 사통팔달의 주앙광장으로 연병장까치 설치한다.
단 하룻밤을 지내드라도 야영지 넓이는 너비 800곱하기 1000미터 광장의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나무와 돌로 울타리를 친다,
하수로는 물론이고 야전변소까지 짓는다. 아무데나 오줌 누다 발각되면 벌받는다.
일몰과 동시에 3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행군도중 또는 저투에서 생긴 부상치료도 받는다.
만일 불침번 서다 졸거나하면 다음날 식사는 말먹이 귀리로 대신해야하며 명령 위반시중대죄수에게는 개인처벌이 아니라 연대책임을 물어 이른바 10분의 1형이 내려진다.
10명마다 1명씩 무작위 추첨으로 걸러내서 동료 병사들에 의해 몽둥이 매질을 당한다.
실제 범인이 자기대신 동료가 매를 맞는 심적 고통을 겪어야하는 장면이다.
사안이 중대한 범죄에는 태형 후 참수형까지 받는다.
로마군단의 군률이 엄한 것은 유명하지만 그런 군률 속에 강군이 키워진다고 보면 이해될 것이다.
古代로마를 다룬 어느 헐리우드 영화에서 본듯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시스템의 중요성, 그것은 <로마史>를 쓴 리비우스가 말한 이 한마디로 요약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戰士는 각자의 運에 따라 살거나 죽거나 한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전사 한 사람의 죽음이 國家의 손실로 당장 이어지는 일은 없다>
오늘은 이만....로마군의 본질은 이쯤에서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믿고 다음 연재부터는 로마대 카르타고전쟁(한니발戰)이야기를 한참 해야할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