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17-
리키니우스法 만들어 다시 시작하는 로마인의 기개를 보자.
멸망 직전의 로마에 돌아온 카미루스는 생애 다섯 번째 독재관이 도어 군을 이끌고 주변 부족들을 재 정벌,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常勝의 전적을 쌓으며 로마의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카미루스는 로무루스에 이은 제2의 건국자로까지 존칭된다.
그러나 로마가 진정 재탄생하느냐는 것은 이제부터의 문제에 달렸다는 것을 그는 절감하고 최중요과제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그리스인 歷史家 포리비우스Polybius는 후년의 大로마를 이루는 원점은 이 <켈트 쇼크>라고 했다.
분명히 폴리비우스 말대로 켈트인의 내습으로 한번은 붕괴 직전에서 로마는 혼미스런 靑春期를 간신이 벗어나 제가 가야할 방향을 확인할 수있었던 젊은이로 보이는게 사실이다. 갈팡질팡 迷惑에서 벗어난 인간의 강건함을 이 시대의 로마에서 니낄수 있다.
로마인은 켈트 쇼크를 되돌아 보고 한 세기나 이어진 귀족과 평민간의 갈등이야말로 로마를 폐허로 만든 근본원인이라는 것을 直視한 것이다.
그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할려면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각오했다.
로마가 不死鳥라는 역사를 창조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해서 나온 것이 BC.367년의 리키니우스法이다.
이 법의 성립에 의해 로마共和政은 비로서 본격적으로 출발했다고 보아 지나치지 않
을 것이다.
우선 강조해야할 점은 이 법률을 구상 제출한 것은 평민출신의 리키니우스였으나 찬성표를 던진 쪽은 원로원 의원의 다수를 점하는 귀족층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한가지만 보더라도 얼마나 로마인의 의식이 전과는 달랐졌는가를 알 수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다.
법의 목적은 말할 것없이 귀족과 평민의 대립 해소에 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로마인이 단행한 개혁은 진정 英斷이란 표현말고 달리 할 말이 없다고 본다.
보통 같으면 귀족과 평민간의 대립을 없애려면 양자가 대등해지는, 즉 두명의 집정관을 양측이 한사람씩 맡으면 된다는 상식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상식을 뛰어넘는 평등치를 고안했고 채택했다.
全面開放의 길을 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번 로마인의 기상을 보게된다.
결국 로마인의 정치개혁은 원로원이라는 聖域에 대담하게 발을 내딛은 것이나 다름 없다. 원로원은 능력에 따른 선별은 있었을지언정 감히 평민이 넘볼 수 없는 귀족들의 牙城이었다.
그 원로원 의석이 중요 공직 경력이 있는 평민에게도 주어지고 그들을 <새로 참여한 분들>이라며 환영을 받게 되는 명실상부한 근대적 의미의 영국식 상원이 그때 벌써 로마에는 성립되었던 것이다.
원로원 개혁에 의해 로마는 진정한 의미의 寡頭政治로 이행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신제도 하에서는 평민들의 대표인 護民官일지라도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원이 된다.
말하자면 노조 위원장이 퇴임 후 회사 이사가 되어 임원회의에 참석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 지위가 세습이 아니기 때문에 평민이 가담했다고 해서 새로운 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니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개혁이라 할 것이다.
역사가 중에는 이 개혁을 민중의 저항을 무디게 만드는 잔꾀에 불과하다고 악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보는 각도는 사람에 따라 틀릴 것이다.
귀족뿐 아니라 평민으로부터도 널리 인재를 모아야 비로서 원로원은 인재풀의 기능을 다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나쁘게 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한편 단 1년 밖에 일 할 시간이 없는 단명의 執政官 제도를 지탱해 가는데는 능력이
뛰어난 장기적 관점에서 정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된다.
공화정의 열쇠는 어쨌거나 원로원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 리키니우스法은 당시 로마인들에 의해 대환영을 받았고 그것을 과시하는 것이 고대로마의 중심부인 포로 로마노에 세워진 콘코르디아神殿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기둥 하나가 남아 있지만 이 콘코르디아신전은 리키니우스法 제정을 기념해서 건조된 것이다.콘코르디아라는 뜻은 영어의 콘커던스(concordance) 즉, 融和 調和 一致를 뜻하는 패자도 동화시킨다는 당시 로마人들의 理念이었던 것이다.
리키니우스法이 로마 천년의 초석이 되어 백년 후 이탈리아半島를 天下統一한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