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13-
그리스에 分立된 여러 도시국가 중 아테네는 크레타 섬의 暴君 미노스를 쓰러뜨린 테세우스將軍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전설이다.
건국초기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아테네도 초기 政體는 王政이었다.
그것이 BC.8세기 경에 貴族政Aristocracy으로 이행되고 9인의 수장들이 1년 임기로 행정 군사 神祭를 관장하고 귀족 장로회의가 이를 보좌했다.
自由民會가 있었으나 발언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BC.7세기에 들어와 자유민 사회가 商工業 발전으로 富를 일구면서 참정권을 획득하게되고 데모스라 불리는 시민 중 솔론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BC.594년 <솔론의 改革>이라는 정치개혁이 단행되고 최초의 Democracy 즉 民主政이 싹튼다. 아테네의 발전은 솔론의 개혁에 의해 첫 발을 내딛게된 것이다.
개혁 이후 아테네는 BC.6세기 말에 이르러 크리스테데스에 의해 시민집회의 권한이 강화되고 문자 그대로 民主政體가 확립되었다.
경제와 민주정치가 발전한 BC.5세기에 이를 무렵, 오리엔트를 석권한 페르샤帝國이 이오니아地方으로 불리는 소아시아 서안의 민주국 그리스를 침공한다.
전쟁도발의 첫째 이유는 경제문제였으나 더 중요한 것은 종교상의 이유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페르샤와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전쟁이었던 것이다.
페르샤전쟁은 먼저 인근 소아시아 일대의 도시국가들에 민주정을 폐하고 군주정을
펴라면서 시작되었다. 이오니아地方은 그리스 본국보다도 경제가 발전했고 정체도
민주정으로 먼저 실현되고 있던 미레토스를 선두로 한 폴리스들이 일제히 페르샤王의 강요에 반발을 했다.
후대에 哲學의 요람으로 알려지는 도시국가 미레토스는 먼저 군사력에서 그리스의 폴리스들 중 가장 강력한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르고스와 전쟁상태에 있으면서 민주정에 호감을 갖지 않은 스파르타는 이오니아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리스人이면서 아카이아민족끼리라는 빌접한 관계에 있던 아테네와 에우베아 두 폴리스가 모두 25척의 배와 전투원을 파견했으나 이것으로는 페르샤의 대적이 되지 않았다. 4년이 되지 않아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반항이 분쇠된 해가 BC.494년이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이간책 없이는 정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페르샤王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우베아 두 폴리스를 징계하기 위해 2만 5천의 육 해병력으로 칭공하여 에우베아는 곧 약탈 파괴되고 주민은 노예로 팔렸다.
다음 BC.490년 아테네 공략으로 발돌린 페르샤군은 아티카지방의 동쪽 해안 마라톤平原에 상륙한다.
페르샤군 내습 소식을 들은 아테네시민들은 처음 당황했으나 즉시 스파르타에 사절을 급파해 원군을 요청했지만 거절도 수락도 안했다. 아테네는 독자 방위전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아테네에는 10인의 '國家政戰略 담당관' 중 결단력 있는 밀티아데스가 있었다.
그는 아테네시는 바다로부터 해군의 수비에 맡기고 당장 1만의 重裝步兵團을 편성, 육군을 인솔하고 적의 상륙지 마라톤평원에 출진했다.
수적으로는 페르샤군에 열세인 것을 지략으로 극복하고 아테네군은 마침내 적 페르샤군을 좌우에서 가위조르기 전법으로 승리를 거둔다. 아테네시를 공략하려던 페르샤해군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陸海戰 함께 필사의 정신으로 무장한 아테네군의 분전에 밀려 페르샤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 아테네 병사 하나가 마라톤激戰의 승리를 아테네까지 달려가 시민에 알렸다.
이 에피소드가 근대 올림픽 마라톤경기의 시발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다.
마라톤의 兩軍 격전에서 아테네측의 전사자는 192명에 지나지 않았다.
페르샤군은 훨씬 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철수했다.
死卽必生의 교훈을 일찌기 가르친 아테네인들이었다.
오리엔트에서는 연전여승이었던 페르샤군도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인들은 알게된 것이다.
마라톤전투로부터 10년 후,BC.480년 선왕 다리우스의 유지를 계승한 페르샤왕 크세르쿠세스는 직접 30만 병력과 1천 척의 군선을 이끌고 그리스를 재침해 왔다.
아테네는 추방된 사람들까지 불러들여 즉각 임전태세를 갖췄다.
이번에는 스파르타까지 합세했다.
異文明 간의 대결을 의미하는 전쟁이었다.
그리스연합군의 작전지휘는 명장 테미스토크레스가 맡았다.
테사리아평원에서 대군을 마주하면 수적 열세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그는 그리스 중부의 산악지대 협곡으로 페르샤군을 유도하여 역전의 용사 스파르타군까지 가세한 복병전으로 적군을 타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국토 3분의2가 30만 페르샤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부수고 빼앗고 죽이고 불지르며 남하를 계속하는 페르샤군 앞에 대들 그리스인은 하나도 없었다.
인적을 찾을길 없이 무인도시가 된 아테네에 일거에 입성한 페르샤왕은 기고만장했다.
병사들은 파괴와 약탈과 방화로 날뛰고 아크로폴리스 神殿에서 솟는 흙먼지가 아테네 상공을 뒤덮었다.
이것은 지략 뛰어난 테미스토크레스의 작전이었다.
그에게는 국토는 태반을 잃더라도 시민의 생명과 중장보병 및 함대의 병력을 보존하는 것이 전략상 중요했다.
다 비워주고 주민 전원은 사라미스島로 소개하고, 병력을 집결시켜 지세를 이용한 단판勝負를 꾀했던 것이다.
전투병을 만재한 함대를 사라미스 해상에 대기시켰다.
선상에서는 불타오르는 아테네시가를 누비며 외치는 페르샤 병졸들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선상의 아테네병들의 적개심을 자극하여 戰意로 불타게 하는 것도 계산된 테미스토크레스의 전술이었다.
단숨에 이기겠다고 생각한 페르샤군이 왕 명령 일하에 해상 대기중인 아테네군선에 달려드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테네의 중장보병과 해병들이 해전에서 페르샤군을 난타, 水葬시키는 장면을 왕 크세르쿠세스는 바닷가 저편에서 소수무책으로 구경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海戰史上 유명한 <사라미스海戰>은 불과 하룻만에 끝났고 적 왕은 페르샤의 수도 스자로 도망쳤다. 에게海에는 페르샤함선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페르샤는 이듬해 설욕전을 꾀했으나 아테네는 다시 테미스토크레스 지휘하에 지상 無人化 해상작전을 구사했다. 이번 전쟁은 그리스 제도시 모무가 재빠리 연합군을 편성, 대전했다.
스피르타王 바우사니아스가 총쥐휘하는 5만병력은 전년과 같이 지상으로 남하하는 페르샤군을 격전 끝에 승리했다. 적은 지난번처럼 헤레스폰트를 건너 아시아로 패퇴해 갔다.
같은 해, 이번에는 그리스측이 공세에 나섰다.
헤상에서는 아테네인이,육상에서는 스파르타인이 주역이었다.
그리스연합함대는 에게해를 동쪽으로 향해 소아시아를 공략했다.
육전 해전 모두 그리스측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샤戰役은 BC.478년 그리스의 역공격으로 끝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게海는 다시 그리스인의 손에 들어왔으며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도 이후 페르샤의 시달림을 받지 않게 도고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군의 覇權國이 된다.
공간적으로 수 천킬로, 시간적으로 2천 여년을 격한 작은 반도의 작은 도시국가가
어찌 북방 동방 대국들을 싸와 이기고 번영을 누려왔는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지대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古代그리스史의 창을 통해 로마를 바라보는 시야가 다소 트인 것으로 하여 다음 연재는 로마로 가봅니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