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8,대회전 후의 逃走와 追跡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죽음 (상)
Gneus Pompeius (BC.106-48)
역사를 읽는 묘미는 로마천년과정이 다 그렇지만 특히 한니발전쟁과 공화정 말 카에사르 활약의 디테일한 묘사에 있지않나 생각한다.
그러기에 거년 연재한 공화정편에서는 한니발 이야기가 많았고 이번 제국편에서는 제국건설의 초석을 놓는 카에사르의 활약에 많은 지면이 할애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 드립니다.
임기응변이든 계탹이든 파르살루스의 회전에서 압승한 카에사르였으나 포로 전원을 석방한 것은 좋다고 치드라도 폼페이우스측의 많은 요인들을 놓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카에사르를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두려워한 것은 폼페이우스 한 사람뿐이었든가?
아무리 병사들을 향해 내건 슬로건이라 하드라도 그는 이런 말을했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토레이우스가 이끄는 7개 군단이 마주치고 나올 스페인을 향할 때에는 <지휘관 없는 군대를 치러간다>고 했으며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차 그리스로 떠날 때는 <군대 없는 지휘관을 치러간다>고 호언했다.
파르살루스회전에서 적의 많은 도망자를 낸 카에사르는 다른 모두는 놔둔채 우선 폼페이우스를 끝가지 추적하기로 결심했다. 그를 방치해서는 내전은 게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서해안 도우라큠기지에 남아있던 변론가 키케로(Cicero)와 아들 카토(Cato)(아버지 카토의 아들)을 비롯해서 파르살루스에서 도망해온 군단장급들 아프라니우스, 베도레이우스와 바쯔로 등은 재규합해서 북아프리카(옛 카르타고)로 가서 捲土重來를 꾀하기로 했다.
그러나 키케로와 바쯔로 둘은 이에 반대하고 로마에 돌아가 문필과 학문생활을 하겠다며 그들과 헤어졌다.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네우스의 베신자라는 비난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카에사르와 文友의 관계이고 바쯔로도 學友 관계로 친한 사이라 카에사르의 관용에 기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후에 바쯔로는 카에사르가 설립하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 관장에 임용된다.
에게海로 도망한 폼페이우스는 징발한 소맥운반선으로는 안전이 걱정되어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방의 항구 안티폴리스까지 가서 5단층의 대형 카레선을 다시 징발해 가라타고 해상탈출을 계속 했다.
당초는 로도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폼페이우스군 재건을 꾀했으나 이미 민심은 이반했고 다시 키프로스를 거쳐 시리아에 가서 재기를 시도하려 했으나 역시 세상 인심은 그것을 허락치 않았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냐 아니면 아들과 동지들이 기다리는 북아프리카냐?
폼페이우스는 망명지 선택에 고민했다.
이집트는 폼페이우스가 군사력을 지원해 쫓겨났던 왕을 복위시킨 프토레마이오스王의 자손 남매가 공동국왕으로 있어 은인으로 맞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한편 북아프리카는 동지들이 있었지만 지난 해 카에사르軍을 괴멸시킨 접경의 기마민족 누미디아王의 오만해진 자세에 자존심이 상해 주위 반대를 무릎쓰고 결국 망명지를 이집트로 결정했다.
한편 배가 없다는 이유뿐만 아니라 동시 다목적 추구를 생활해 온 카에사르는 폼페이우스 추적을 육로로 하기로 결정했다.
폼페이우스 지배하에 있던 동방 재국을 카에사르 체제로 재편하는 일을 함께 추진하여 일석이조를 거둔다는 목적이었다. 파르살루스회전 소식은 벌써 가는 곳마다 먼져 전해져 있었다.
카에사르는 계속 육로로 동진해 그리스와 소아시아에 걸친 다다넬즈해협에 도착했다.
폼페이우스로부터 명을 받아 근해를 지키고 있던 자가 5년 전 파르티아遠征(페르시아)서 완패한 카에사르의 3頭政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軍의 유일한 생존 지휘관으로 그후도 계속해서 시리아屬州에 머물고 있던 카시우스이다.
회전 결과를 알고 있던 그는 폼페이우스파였기에 군선 10척에 병사들과 함께 저항 없이 카에사르에 항복해 왔다. 이 카시우스가 파르살루스에서 용서받은 마르크스 브루투스를 끌어드려 이로부터 4년 뒤에 일어나는 카에사르암살사건의 주모자가 되는 바로 그다.
폼페이우스가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굳이 이집트 행을 택한 다른 하나의 이유는 현 왕조가 앞서 말한대로 폼페이우스의 은혜를 입었을뿐만 아니라 카에사르와의 대결 전에 폼페이우스의 지원요청을 받아 공동통치자인 크레오파트라와 동생 왕으로부터 50척의 군선 지원까지 받은 바있어 마음 놓이는 우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로 남쪽을 향해 순조로운 항해 도중 폼페이우스는 이집트의 소년왕 앞으로 자기 일행을 손님으로 맞아주기 바란다는 친서를 쾌속정에 띄워 보냈다. 환영한다는 이집트로부터의 회답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안도하고 자기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패전 후 침통한 나날을 보낸 58세의 노장군은 원기를 얻어 왕 앞에서 할 연설 초고를 준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위 독점을 노려 벌어진 남매의 측근들의 부추김으로 내분이 일어나 누이 클레오파트라가 쫓겨난 형편에서 兵을 모아 거사를 준비중이었고, 한편 15세의 어린동생 왕은 보좌라기보다 왕을 조정하던 측근들에 둘러싸여 정사에 눈이 어두웠다.
어리지만 15세 왕의 입장에서는 왕권 독점을 다투는 상황에서 과거 무명을 떨친 폼페이우스를 내편에 두는 것은 그의 시장가치로 보아 유익하다고 보았으리라.
그러나 측근들이 보는 폼페이우스는 결전에 패하여 오리엔트 제국으로부터도 문전박대를 받아 도망온 인물이다. 가뜩이나 왕권 다툼으로 어수선한 정세에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10년 전 현 왕조를 복위시키기 위해 폼페이우스군으로 원정와 그대로 체류하면서 이집트화한 로마인들이 환관들과 모의한 것이다.
결론은 죽인다였다.
동족 로마인 기준에서 보면 폼페이우스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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