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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政官 푸블리코라는 압박하는 敵의 분산을 노려 포위된 로마로부터 탈출을 가장한 양치기전술을 구사한다.
로마 서쪽을 구비쳐 흐르는 테베레江으로부터 가장 먼 세르비우스城壁 동측 에스퀴리노門으로부터 양치기 하나가 소와 양떼를 몰고 탈출극을 벌이게한 것이다.
한 무리의 소와 양떼를 본 에토루리아軍이 그냥 놔둘리 없었다.
호박이 널쿨째 떨어지는데 아니먹고 배길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앞다투어 진지를 버리고 소와 양떼를 쫓았다.
테베레강 西岸에 포진했던 병졸들까지 배를 타고 건너와 합세하여 거저먹을 수 있는 전리품 챙기기에 바빴다.
적병의 동정을 탐지한 푸블리코라는 준비된 작전대로 각부대 지휘관에 명령했다.
첫째 지휘관은 동쪽에 열린 에스퀴리노문으로 출격한다.
둘재는 북쪽으로 열린 코리나문으로 출격하고 동료집정과 루쿠레티우스 군은 남쪽으로 열린 네비아문으로부터 출병시켰다.
푸블리코라 자신은 남동쪽의 카페나문에서 출격했다.
가축을 쫓느라 정신팔린 에토루리아군은 돌연 배후를 기습 당한다.
이들은 추격하던 처지에서 추격을 당하는 입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적장 보르센나가 받은 손실은 막대했다.
그러나 식량 반입을 차단한 에토루리아군의 포위망은 풀리지 않았다.로마의 곡창은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그 로마에 무키우스라는 열혈 애국청년이 있었다.
정체절명의 위기에서 로마를 구하기 위해 청년은 보르센나를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독단 결행하면 탈주병으로 오인 받을 것을 생각해 무키우스는 원로원과 집정관의 허가를 받아 短劍만을 품고 헤엄쳐 테베레江 西岸으로 건넜다.
적진에 침입해 보르센나王 가까이까지 접근하는데 성공, 병졸들에게 급료를 지급해주고 있는 자가 왕일것이라 판단하고 단검을 들고 돌진하여 일격에 찔러 죽였다.
그러나 왕을 하번도 본적 없는 무키우스는 화려한 군장의 그가 왕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결행 했으나 죽인 그 자는 왕이 아니라 財政官이었다.
주위의 적병들에게 붇들린 무키우스는 진짜 왕 앞에 포박되어 끌려갔다.그러나 가슴을 활짝 펴고 왕에게 말했다.
"나는 로마市民이다. 이름은 가이우스 무키우스. 적장을 죽이려고 감행했으나 애석하게도 사람을 잘못 봤다. 죽을 각오는 되어있다. 자기 운명을 감수하는 것은 로마인의 矜持이다.
로마 젊은이들은 당신에게 끝없는 도전을 선포한다. 戰場에서의 싸움이 아니다.내 뒤에 또 한 사람, 그래도 안되면 또 다른 한 사람, 싸움은 당신을 죽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왕도 각오하는 것이 좋다."
화가 난 적장 보르센나는 고문을 해서라도 배후를 캐려고 했으나 청년은 한층 큰 소리로 말했다.
"겁쟁이만이 제 몸를 소중히 생각한다!"
이렇게 외친 무키우스는 작렬하는 횃불을 왼 손에 쥐고 자기 오른 손을 지져댔다.사람 살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진동했다.
왕 보르센나는 청년에 말했다.
"좋아. 너는 내게 주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너 스스로에게 주었다.
너의 대담성을 산다. 내 백성 가운데도 너 같은 젊은이가 있으면 좋으련만....너를 조건 없이 풀어준다." 하면서 일어나 가라고 했다.
가이우스 무키우스는 그 후 사람들에게서 '외손잡이' 별명으로 불렸다.
아마도 로마시대의 어린이들은 이런 애국적 무용담에 눈을 반짝이며 귀를 모아 들었을 것이다. 2천 5백년 전 당시 로마는 배울 역사는 짧았지만 영웅 이야기들을 들을 시간은 충분했으므로.......
오늘날 한국 아이들의 교실에서 무미건조한 작대기暗記나 하는 모습과 한번 비교해 보자.
무키우스의 용단을 본 보르센나는 마침내 로마에 和平을 제의해 왔다.
푸블리코라는 에토루리아왕이 제시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거절하고 하나는 수락했다. 거절한 것은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였고 받아들인 것은 지난 전투에서 로마가 획득한 우에이 영토의 반환이었다.
보르센나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는 물건너 갔고 로마와 에토루리아 간에는 잠정평화가 찾아 왔다.
BC.503년 로마가 공화정이 된지 6년째 되는 해, 집정관 푸블리코라도 壽를 다했다. 裕福했던 재산도 없애 장례비조차 없이된 바레리우스家를 위해 로마人들 한 사람씩 추렴을 해서 푸블리코라의 장례를 치러줬다.
브루투스의 喪 때와 같이 로마 女人들은 푸블리코라에게도 1년 喪服을 입어주었다.
로마 千年史 중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공화정 성립과정 6년간 브르투스와 푸블리코라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어느 때보다 많았다고 본다.
여기서 향후 5백년 가게되는 로마공화정의 發芽 着根과정의 이야기를 일단락 짖고 로마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동시대의 그리스와 스파르타는 어떠했는가 다음 연재에서 잠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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