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10-
두 아들의 목을 치고 공화국 역사의 밑거름으로 전장에서 병졸들 環視裡에 장렬히
산화한 브루투스는 우리에게 암시했다.
"2천 5백년 뒤 이탈리아반도를 닮은 동양의 한반도에 나와 같은 嚴父가 있었다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같은 아들들의 농단은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국의 졸장부들이 진작 브루투스에게서 배와야했을 교훈이라는 말이다.
브루투스는 공화국 집정관으로서 왕위 복귀를 꾀하는 전왕 타르퀴니우스의 에토루
리아연합군과 로마에서 하룻길 거리에서 맞서 一騎決鬪로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테스와 고종사촌간의 혈투 끝에 두 장수들은 서로의 일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
져 함께 전사를 했다.
이튼날 날이 밝자 다시 전장에 진출한 로마군단 앞에 적군의 모습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戰死者 한 명이 더 많은 타르퀴니우스측은 不吉을 예측하고 패전을 자인하
며 모두 후퇴해 버린것이다.
로마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고, 함께 출정하여 보병을 지휘하던 동료 집정관 바리
우스의 품에 안겨 로마에 시신으로 돌아온 브루투스는 전 로마가 오열하는 가운데
장례가 嚴修되고 로마 여인들은 부친상 때처럼 일년 喪服을 입었다.
이렇게해서 공화국 건설의 아버지 브루투스를 잃은 로마인들은 눈물도 마르기 전에
살아남은 바레리우스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다.
지도자 입장에 서면 예나 지금이나 이르든 늦든 사람들의 질시와 중상의 대상이
되기 쉬운 것....
질시의 첫째 원인은 네 마리 白馬가 끄는 바레리우스의 개선식이 시민들의 비위를
상하게한 것이다. 개선식은 로므루스 이래 로마의 전통이었으나 처음 보는 4두의
白馬戰車는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부자 집정관의 돈자랑이긴 했으나 시민들로서는
그 개인의 王者 취향으로 보았던 것이다.
로마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그의 궁궐 같은 집도 또한 君王 취향으로 보였다.
이를 눈치챈 바레리우스는 많은 인부를 동원해서 하룻밤 새에 집을 헐어버리고 땅
값이 싼 성벽 가까운 변두리에 간소하게 짓고 대문도 언제나 개방해 두고 누구든
자기의 생활 모습을 들여다 볼수있게 했다.
사생활 정리에서 그치지 않고 바레리우스는 민중이 환영할만한 법률들을 차례차례
제정해 간다.
그 첫번째 조치가 왕정시대 왕의 관리하에 두었던 國庫를 재무관이 관리하는 법이다.
정치 군사에서는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이라도 국가의 재정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법은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다른 하나는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 대해서도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는 시민집회에
控訴權이 있다는 법이다. 인궈을 중시하는 이 법의 제정은 후세에 이르기까지 로마
의 중요한 법개념을 형성하게 된다.
<왕위를 노린 者는 누구든 그 자의 생명과 재산은 神들의 것이 된다>는 법도 만들었다.
왕위에 야심을 품은 자를 죽여도 증거만 있으면 죄를 묻지않는다는 것이다.
좀 지나친 법으로써 한참 뒤에까지 로마人을 속박하는 법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해 제정된 법률들로 인해 입안자인 바레리우스의 인기는 높아갔다.
사람들은 그런 푸블리카(Publica=Public) 즉 公共의 이익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이후
바레리우스를 푸블리코라라는 멸명으로 부르게 된다.
푸블리코라는 이들 법들을 차례로 제정하고나서 다음 해 BC.508년의 집정관 선거에서 재선되고 동료에 티토우스 루쿠레티우스가 선출되었다.
의심 없이 재선된 푸불리코라도 3대에 걸친 에토루리아계 출신 왕들의 힘에 의해 축적된 로마의 국력이 에토루리아를 적으로 돌리고 이웃 동맹국들마자 반기를 들게되므로
약화 일로를 걷게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전 약육강식 시대의 산물이던 라틴同盟도 와해되고 매년 인접국 상대의 전쟁을 피
할 수없이 되었다.
타르퀴니우스왕을 추방하고 공화정 탄생과 함께 생긴 문제는 강국 에토루리아를 적으로 돌리고만 것이 화근이 되어 국력쇠퇴를 가져온 것이다.
에토루리아人의 국외 유출로 인해 약화된 로마의 경재력을 오스티아의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을 국가 전매품으로 하고 통화대용으로 활용하여 국고 수임을 확보하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상업에 종사는 사람들에게 부과해온 間接稅를 경감해 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새로
通商에 종사하게 되고 로마가 다시 農牧國으로 되돌아가는 위험에서 탈출하면서
동시에 자생기술도 발전하여 국력의 회복을 가져오게되었다.
추방된 전왕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 노력은 집요하였다.
에토루리아연방에 속한 명장 보르센나 왕을 부추겨 로마로 진격해온 타르퀴니우스
는 종국은 패주하지만 한때 로마를 포위해 시민의 식량공급을 차단하고 푸블리코라의
백기투항을 강요했다.
여기서 적을 제압하는 푸블리코라의 저 유명한 애국심과 결부된 양치기전술의 절묘한
작전이 나온다.
이하는 다음에 열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