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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史에서 敎訓 얻기-9-
BC.509년, 왕국 244년만에 로마는 공화국으로 이행했다.
古代史家 리비우스는 <로마史> 첫머리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제부터 자유를 얻은 로마人이 평시든 전시든 어떻게 살았느냐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로마는 1년마다 투표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고 개인보다 법이 지배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브루투스는 왕을 추방한 직후 로마광장에 시민을 모아놓고 이후 로마는 어떤 인물이든 王이 되는 것을 용납치 않고 누구든 로마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용서치 안는다고 선서했다.
왕 대신 1년마다 시민집회에서 선출되는 두 명의 執政官 제도를 창설한 것이다.
초대 집정관에는 브루투스와 자살한 루쿠레티아 부인의 남편 코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브루투스는 역사의 고비에 나타나는 先見과 실천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모친은 추방된 왕 타르퀴니우스의 누이이므로 왕과는 숙질간이었다. 브루투스라는 성도 원래의 성이 아니라 멍텅구리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별명이다.
멋대로 專橫을 일삼던 타르퀴니우스 시절을 바보로 경멸 당하며 은인자중했다고 한다.바보를 뜻하는 말이 결국은 성이 된 것이다.
1인의 왕에 의한 횡포를 방지하기 위해 개혁된 집정관은 1년의 짧은 임기이나 재선은 허용된다. 이 제도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권위와 권력을 갖는 원로원을 강화했다.
왕정 초기 백명으로 출발하여 타르퀴니우스에 의해 2백명으로 배증된 종신제 원로원을 브루투스는 다시 3백명으로 증원하여 신흥세력의 유력가문을 다수 영입했다.
언제 어디서나 개혁으로 득을 보는 쪽이 있으면 반드시 손을 보는 쪽이 있기마련이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대변혁을 이룬 로마에도 손해를 본다고 인식한 수구세력의 불만이 태동한다.
종신제의 원로원 의원은 모두 유력가문의 가장들이다.
그리고 집정관도 원로원 의원 중에 발탁, 선출된다.
유명가문 자식들은 가장이 되어 원로원에 들어가려면 종신 의원인 가장 즉 아버지가 죽거나 유고여야하는데 그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을 수없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었던 것이다.
왕정시에는 왕의 기분에 따라 젊은이도 발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명문가 자식들은 공화정 이행으로 저들의 앞길이 막혔다고 본 것이다.
한 집에 은밀히 모인 로마의 386들은 추방된 타르퀴니우스왕을 회복시키기로 결의했다. 王政復古 음모였다. 혈서로 서약서까지 썼다.
이 사실을 음모장소로 한 그집 노예 하나가 시종 지켜보고 있었다.
노예는 즉시 집정관에 밀고하였다.
즉각 음모 가담자 전원이 체포되고 증거물로 서약서도 압수되었다.
심문을 맡은 두 집정관으로서는 심각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386 전원이 잘 아는 집안의 자식들이었으며 음모장소는 집정관 코라티누스의 친척집이었다. 그뿐 아니라왕정복고를 꾀한 이들 젊은이들 가운데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과 코라티누스의 아들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소집된 시민집회에서 386들의 서명된 서약서가 공개되고, 국가반역죄로 고발된 그들 중 누구 하나 반박하는 자 없었다.
침묵으로 지켜보던 시미 중 몇명이 브루투스의 심중을 읽었음인지 추방형에 처할 것을 제안했다. 집정관 코라티누스의 얼굴에 흐르는 父情의 눈물이 아마도 사형이 아닌 추방형으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집정관의 결정도 둘 중 하나가 반대할 경우 효력을 상실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이 때 집정관으로서가 아니라 자식에 대해서는 生殺與奪權이 인정되는 로마 가족의 가장된 입장에서 판결을 내렸다.
브루투스는 피고석에 선 두 자식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티토우스, 티베리우스, 너희들은 어째서 고발된 너 자신들을 지키려하지 않느가?"
둘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부친은 세 번 되물었으나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브루투스는 집행리에게 말했다.
"이제 할 일은 그대가 맡아라"
브루투스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옷이 벗겨지고 양손이 뒤로 묶여진채 매질을 당하고 마침내 도끼로 목을 치는 극형에 처해졌다.
민중은 참혹한 광경에 눈을 감았으나 집정관 아버지 브루투스는 끝까지 아들의 처형장을 지킨 뒤 퇴장했다.
로마의 386들 수 십명을 일소한 브루투스의 단호한 행동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찬사가 높은 반면 눈물을 보인 다른 한명의 집정관 코리티누스의 태도에 대해서는 의심의 눈초리가 점증했다.
이를 눈치챈 코라티누스 자신은 단지 죽은 아내 덕분에 집정관이 되긴했으나 더 이상 민중의 변화된 시선을 참을 수없다고 판단, 그는 집정관을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이웃 국가로 망명했다. 로마에는 자진 망명자에 대해서는 잘못을 묻지 않는 불문률이 있었다.
공석의 집정관에는 유력자이지만 전왕 타르퀴니우스와는 전혀 연고가 없는 바레리우스가 2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브루투스와 동주하게 되는 바레리우스는 이후 왕위 복귀를 꾀하는 전왕 타르퀴니우스와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브루투스에 이어 공화국의 기초 확립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된다.
오늘은 이만...... 읽어주시는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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