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8-
암살된 先王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코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양자로 입양 후 사위가
된 세르비우스였으나 선왕에는 親子도 있었다.그러나 로마의 왕위는 세습이 아니다.
세르비우스왕은 44년의 긴 治世에 심신이 피로해졌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선왕 타르퀴니우스에게는 두 손자가 있었다.
현왕의 두 딸과 선왕의 두 손자들은 맏이들이 야심찬 외향성이었고 둘째들은 온순한
내향성이었다.
부부 융합을 위해, 왕은 서로 다른 성격의 남녀를 교차해서 결혼을 시켰다.
이상스럽게 착한 딸과 착한 사위가 요절을 하고 야심찬 딸과 사위가 각각 과부와
홀아비가 되면서 딸 토우리아의 적극적 프로포즈로 죽은 동생의 남편인 야심가
타르퀴니우스3세와 재혼을 한다.
왕 세르비우스는 둘의 재혼을 찬성도 반대도 없이 방관했다.
결국 야심자끼리 부부가 된 것이다.
이것이 로마王政의 종언을 고하는 조종의 첫 종소리가 되는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딸 토우리아는 남편에게 야심의 불을 지핀다.
"당신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라면 나는 당신을 남자로 보고 존경을 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 운명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데 어찌하여 내닫지 않는가?
안그러면 코린트든 타르퀴니아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라" 고 남편의 야망에 불을
질렀다고 史가 리비우스는 말했다.
야먕에 불을 붙인 타르퀴니우스3세는 로마 거주 에토루리아인과 로마 개발사업과
상공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계급의 원로원 의원들을 지지세력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는 무장을 한채 원로원에 들어가 연설을 한다.
출신 성분도 불분명한 자를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로마인의 수치라고 하면서 장인
되는 왕을 공격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찬성도 반대도 안했고 왕을 모독하는 그를 내쫓지도 않았다.
백주 謀叛劇이 벌어지는 원로원에 달려온 세르비우스왕은 사위에 의해 계단 밑으로
집어내던져지는 소동이 빚어젔다.
다행이 죽지않은 왕은 왕궁으로 피신했으나 거기에는 사위가 보낸 칼이 기다리고
있었고 쓰러진 왕은 마침내 딸이 모는 馬車에 轢殺역살되고 만다.
왕정 종식의 두번째 울린 조종이었다.
사위 타르퀴니우스3세는 왕이 되고 딸 토우리아는 왕비가 된다.
많은 로마시민을 울린 육친을 역살하고 왕위를 簒奪하는 비극 뒤의 결과이다.
이렇게해서 타르퀴니우스3세는 시민집회의 투포는 고사하고 원로원의 찬성도 없이
폭력으로 왕권을 잡고 왕정의 마지막 7대왕이 되었다.
暴惡王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세 아들 가운데 세쿠토우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세쿠토우스가 친척 코라티누스의 부인 루쿠레티아를 몹씨 짝사랑 한 끝에 치명적
스캔들 사건이 발생한다.
가슴 속에 연모의 불덩이를 안은 그는 남편 코라티누스가 출정 중에 그녀 집을 방문
하여 의심없이 대접 받고 하룻밥을 그집서 자게된다.
이 청년은 기회로 보고 한밤중에 홀로 자던 부인 루쿠레티아의 방에 단검을 품고
침입하여 그녀를 욕보이고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친척 젊은 아이에게 능욕을 당한 부인은 로마에 있는 친아버지와 아르디아戰場에
출정 중인 남편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정절을 빼았긴 사실을 알리고 억울함을 호소
했다.
부친이 서둘러 오고 남편 코라티누스는 전장의 동료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
왔다. 루쿠레티아 부인은 사정을 설명하고 감춰두었던 단검으로 가슴을 찔으고 숨을
거두며 마지막 유언으로 못된 젊은이에 복수를 호소했다.
루쿠레티아의 시신은 로마의 포로 로마노광장의 연설대에 안치되고 사람들은 왕가
일족의 야만과 오만을 비난했다.
브루투스는 시민들에게 연설했다.
왕정이 마지막 조종을 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일순이었다.
포악하게 왕위를 찬탈한 타르퀴니우스3세에 대한 그간 로마인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왕은 추방되고 왕비와 세 아들 일족은 도망치고 범인 세쿠토우스는 도망가다가 전에
모욕당한 바있는 청년에 붇들려 살해되고만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밖에서 에토루리아 지원을 얻어 왕위복귀를 노렸으나 이미 공화정 초대 집정관이 된 브루투스와 죽은 貞節女 루쿠레티아의 남편 코라티누스의 대적이 되지 못했다.
건방진 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왕의 통치 25년을 더하여 244년의 역사를 이어온 王政은 BC.509년에 共和政으로 전화한다.
왕정 시대의 로마를 1인의 왕이 통치하는 政體였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역사의 정확한 파악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공동체도 초기에는 중앙집권적일 때 효율적이고 조직이 아직 어린 시기에 활력을 낭비하지 않게 되는 장점이 있다고 본다.
로마 7인의 왕들의 역사는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適時 適材 適所의 원칙이 드러맞는 역사라고 보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왕들 모두가 장수했고 평균 1인 통치기간이 35넌에 종신이었기에 선왕의 업적 위에
안심하고 신왕의 업적이 축적 될 수있었으며 중단 없이 청책이 이어져 로마는 땅 속
깊숙히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다.
루쿠레티아 부인 사건의 발생과 명장 브루투스의 등장으로 로마王政은 BC.6세기 말에 그 사명이 끝나가고 있었으리라.
이것으로 王政 하의 로마사를 마감하고 이하 브루투스 시작의 共和政을 들여다 본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