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6-
2대왕 누마의 外孫 마르키우스가 4대왕에 오르고 로마의 국세는 주변을 압도하게된다.
테벨레江에 다리도 처음 놓고 河口의 오스티아를 정복, 지중해에 출구가 열리게된 로마는 물물교환시대의 통화 역할을 하는 소금밭도 생겨 통상력을 가추게 되었다.
땅을 다져가며 서서히 그러나 착실히 세력권을 넓혀가는 동안 동화정책은 異分子의 혼입도 허용할 수밖에 없이된다. 마르키우스왕 재위 25년 기간 중 건국으로부터 139년되는 어느날 로마인들은 이상한 광경 하나를 목격했다.
소달구지 여러대를 끌고 화려한 의상에 머리를 길게 느러뜨린 낯선 異邦人 一家가 로마에 들어오는 모습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차 5대왕이 되는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코 家門 잍족이었다.
그는 그리스의 코린트에서 에토루리아에 망명한 그리스계 아버지와 에토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경제문제에서는 이민족을 따지지 않치만 자기네들 사회에 이민족의 피가 들어오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에토루리아에서는 이방인으로서 지위 향상따위는 바랄 수 없는 거기를 떠나 밖에서 運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코린트의 피를 잇고 있으므로 코린트 식민이 건설한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갔어도 되었겠지만 굳이 로마를 찾은 까닭은 로마가 야심을 펼 기회의 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마나 마르키우스의 예처럼 건국 당사자인 라틴인이 아니더라도 왕이 될 수있다는 사례가 그에게 매력이었을 것이다.
양친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재력가로서 로만인 사회에 침투해 재주것 처세해여, 이 이방인은 마침내 마르키우스王의 遺言執行人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공증인으로 만족하지 않고 왕이 죽자 스스로 왕에 입후보하여 선거운동을 벌인다.
아마도 선거사상 초유의 선거운동에서 "전해진 바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왕에 선출되기 위해 로마에서 연설을 하고 시민들에게 자기에 투표해 달라며 유세를 펼쳤다"고대 史家 리비우스는 <古로마史>에 쓰고 있다.
처자 함께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에 온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이주 불과 10년만에 로마시민의 압도적 지지로 제5대왕에 선출된다.
건국 150년래 라틴, 사비니, 라틴, 사비니로 두 민족에 번가라 이어진 로마의 왕위가 처음으로 에토루리아계에 주어지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文武 겸전의 5대왕 타르퀴니우스의 37년간 치적은 한마디로 대단하다.
국가가 운을 만나려면 白馬 탄 超人이 아니라 하다못해 소달구지 탄 초인이라도 오기마련인가 보다.
로마의 세력권은 다시 확장되고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도시가 변모해 갈뿐만 아니라 시민 생활수준도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즉위하자, 로무루스 이래 100명의 원로원을 200명으로 배증하게된 배경에는 민중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그였지만 조석 변의 민중에만 의존하기보다 왕이 지명권을 가진 원로원의 지지세력 화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기반을 확고히 다진 타르퀴니우스왕은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 솔선 출진한다. 격전 끝에 얻은 승리의 결과물로 패자동화정책 대신 쟁취한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앞세워 로마에 개선하여 많은 로마시민으로부터 격찬을 받는다.
하지만 이후 타민족의 로마이주는 변함 없이 계속된 것으로 보아 로마가 동화정책을 완전이 버린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자한 新王으로서의 일시 인기술책이었음을 알게된다.
왕의 위세에 주늑 든 주변 부족들이 조용해진 가운데 타르퀴니우스왕은 평화시를 이용하여 로마의 개발사업을 펼친다.
일곱개의 구릉에만 로마인이 모여 살기에는 한계에 달했다고 보고 늡지가 많은 저지대에 하수구를 매설해서 물을 빼고 대규모 주거지로 개발하는 것이다.
지금도 테벨레강에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하수구는 이때 매설된 로마인의 토목공사 실력을 입증한다.
지금의 로마시는 이때 기초가 닦이면서 에토루리아로부터 도입된 석조건축기술을 이용하여 공공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는 포장되고 로마의 심장이랄 수 있는 포로 로마노의 탄생도 보게된다.
파라티노구릉과 아벤티노구릉 사이의 질펀한 습지대도 메워져 공공시설이 들어서고 대경기장이 겅설되었다.
그리고 로마사의 발원지랄 수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로마의 신들 중 최고의 신, 유피테르神(주피터신)에 바쳐진 신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神들도 비로서 재자리를 잡게된다.
에토루리아나 남쪽의 그리스계의 시각으로는 도시라고 할 수없었던 로마도 하수구를 이용한 간척사업과 테벨레강 하구에 항구를 갖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이탈리아에서 볼 수 없었던 모양의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시기의 개발사업을 인력으로 담당한 것은 로마軍團 병사들이다.
왕이 군사를 사용한 것은 사가 리비우스에 의하면 "평시에도 병사들을 전시와 같이 활동시켜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타르퀴니우스왕에 의한 군단병의 공공사업 투입 선례는 로마사가 끝날때까지 계속된다.
어느날 왕은 한명의 에토루리아 소년을 만났다.
노예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으나 왕은 개의치 않고 친아들과 함께 길렀다.
소년이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영리함이나 용기에 대항할 자는 로마 귀족 자제 중에는 없었다.왕은 그를 사위로 삼았다.
다음 왕위를 엿보던 선왕 마르키우스의 두 아들은 혹시 현왕의 여전한 인기로 보아 사위가 다음 왕위를 계승하게되면 낭패라고 생각한 끝에 치세 37년의 타르퀴니우스왕을 살해한다.
허나, 이들은 왕위 계승에 실패하고 결국 타르퀴니우스왕의 왕후의 보살핌으로 사위 세르비우스르가 시민집회의 투표를 거치지 않고 원로원의 결의만으로 제6대왕에 즉위하게 된다.
이 변란끝에 왕에 오른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가진 로마시민으로서는 더할나위 없는 국가적 해운을 맞보게된다. 과연 타르퀴니우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던 것이다.
로마를 도사다운 도시로 발전시킨 이름하여 이방인, 타르퀴니우스왕의 후계왕 세르비우스 토우리우스의 이야기는 다음에 잇기로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가 되려면 인물이 인물을 골라야 된다는 것을 로마사에서 다시 배운다.
오늘은 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