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5-
우리가 흔히 큰 일을 도모할 때 로마의 成立을 교훈으로 삼는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치 중심의 통치를 한 2대 누마왕은 즉위와 함께 통치 스타일을 선왕 로무루스의 武官政治에서 철저히 文官政治로 바꾸었다.
의상도 王權의 상징인 보라색 대신 흰색의 神官服 토가로 갈아 입었다.
왕은 가끔 시종도 물리치고 혼자서 숲속을 찾아 님프 精靈과 대화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개혁안을 내 놓는다. 시민집회와 원로원은 이를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정책으로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권력이 반드시 무력형식으로 행사돼야 실효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는 實例이기도 하다.
43년간 로마를 지배한 누마의 내치중심 통치가 끝나고 토우루스 호스티리우스가 3대왕에 선출된다.
초대 로무루스왕을 닮은 이 로마인은 공세적 무관형의 인물로 통치 중심을 내치에서 국외로 옮기고 로마인에게는 조상의 땅이기도한 이웃 아루바를 공격 제일목표로 삼아 開戰 구실을 찾는다.
양국 국경지역서 농민들 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약탈행위에 대한 보상 요구를 아루바측이 거부하자 전쟁은 기다렸다는 듯이 터진다.
80년에 비해 400년 역사의 아루바는 간단히 꺾일 상대가 아니었다.
토우루스왕은 강국 에토루리아를 이웃에 두고 소국끼리 無用의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보고 양쪽 대표끼리 결투로 승부를 짓자고 제의했다.
로마군과 아루바군은 각기 一家 3명씩의 형제가 있었다.
호라티우스家의 3형제와 크리아테우스家의 3형제가 대표 결투사로 뽑혀 포진한 양군 앞에 나와 승부를 가리게 된다.
두 명이 먼저 희생된 로마측의 혼자 남은 騎士가 도망을 치면서 말에서 뒤돌아 휘두른 칼에 쫓아오던 아루바 기사 두 명이 차례로 쓰러젔다.
일대 일 맞대결에서 기량이 앞선 호라티우스家 전사가 아루바의 크리아티우스 전사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로마의 승리로 결투는 끝났다.
그러나 단 한번의 결투로 나라의 운명을 결정 짓기에는 억울하다고 생각한 아루바왕은 자기는 싸우지 않고 이웃 부족들을 충동하여 로마에 맞서게 했다.
엉뚱한 적을 만난 토우루스왕은 아루바를 제쳐두고 다른 부족들과 싸울 수밖에 없이 되었으나 이들은 대적이 되지 않았다. 주변을 간단히 정리한 로마군은 토우루스의 진두지휘 하에 마지막 적 아루바 공략에 나서니 아루바도 간단히 落城되었다.
아루바왕은 붇들려 약속 불이행의 책임을 물어 양 다리에 밧줄을 매어 두 필의 말이 당겨 사지를 찢는 로마史에 처음 등장하는 극형으로 다스러졌다.
아르바의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고 주민은 로마에 강제 이주되었다.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시민으로서였고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도 주어져서 로마시 일곱 개의 언덕 중 하나 체리오 언덕에 정착하게 된다.
퀸티리우스, 세르비우스, 유리우스 등의 아루바의 유명 家門은 로마 귀족으로 대우받고 그들 대표에게는 원로원 의석도 주어졌다.
만약, 이 때 아루바의 주민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후일 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유리우스家 출신의 카에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해방정국에서 민족을 생각하여 잘못 고른 좌익에 빠졌다가 참회하고 길을 바꾼 박정희 대통령의 기구했던 역사가 생각나 그냥 넘어가지지않는다.
그뿐 아니다. 구시대 빈농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날 때 여러번 낙태를 기도했던 어머니 배남의 모태에서 사산되었더라면 박정희라는 민족의 은인은 존자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550년 후 역사 전환의 싹은 이때 씨가 뿌려져 틔우게 되었으니 로마대 아루바전쟁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었던가.
아루바 공략은 당순히 근린 부족에 대한 공략과는 달리 라틴民族의 母國은 이로부터는 로마가 말을 한다는 宣言이기도 했던 것이다.
로마도 이제 어디서 비져나온 자들이 모여 세운 변방의 작은 집이 아니라 라틴민족의 宗家가 된 것이다.
로마인은 로무루스 이래 敗者同化 로선을 계승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안으면 배신자로서 용서없다는 정책로선을 확립한 것이다.
사비니의 동화로 이미 배증된 로마 인구는 아루바인을 받아들여 다시 늘어나게된다.
같은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은 같은 의무도 기대된다는 뜻이다.
당시 시민 의무의 첫째는 兵役의무였다는 점에서 로마의 戰力도 그만큼 증강하게된다.
그 군사력을 이끌고 전쟁에 전쟁을 거듭한 건국왕 로무루스 이상의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3대왕 토우루스의 治世도 32년만에 끝난다.
古代 史家 리비우스에 따르면 戰場서의 落雷에 의한 죽음이라고 한다.
로마가 건국 이래 정복민족의 동화정책을 계속해 오면서도 배신자에 대해서는 단호한 응징정책을 구사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하고 있는 국가적 상황에서 귀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