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에서 敎訓 얻기-3-
로마인들에 의한 사비니족 여자 약취 결혼이 양민족간 전쟁으로까지 발전했으나 사비니족 여자들의 중재로 이해가 합치된 두 민족은 전쟁을 멈추고 화해를 넘어 일국이 되어 이후 로마국을 공동 운용하게된다.
로마의 로무루스王과 사비니의 타티우스王은 두 나라가 같은 세력권으로 통합해서 두 민족이 평등권을 가지고
로마국 건설에 참여할 것에 합의 한것이다.
사비니족 전원은 사유재산권 뿐만 아니라 시민권은 물론 市民集會의 투표권까지 갖게되고 장로들에게는 元老院 의석도 배정되었다.
로무루스의 입장에서는 당면과제였던 인구 증가와 병력 증강의 터전이 마련된 셈이다.이것은 당시의 로마인이 생각하고 있던 이상의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기도하다.
푸루타루코스는 <英雄列傳>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敗者마저도 자기들에게 同化시키는 방법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
로무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建國者라면 의당 그러했을 전투에 의한 국토의 확보였다.
사비니의 타티우스왕은 조만간 전사하고 전투 지휘권은 거의 독점했다. 약관 18세에 시작해서 로무루스의 37년간 治世의 태반은 새로 탄생한 국가의 숙명이기도한 근린 부족과의 전쟁에서 얻어졌다.
백명의 병사를 한 무끔으로한 百人隊(켄토우리아) 제도를 고안한 것도 그였다.
이것은 로마가 상존하는 한 계속 유지된 로마軍團 최소 단위의 로마군의 핵 역할을 한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전사자도 많이 나왔으나 로마의 人口도 戰力도 꾸준히 증대해 갔다.결국 사비니족과의 통합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통치 39년 째를 맞는 BC.715년, 루무루스는 일상의 軍隊司閱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일순간 먹구름이 덮히고 뇌성벽력이 엄습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로 시야가 가리고 귀청을 찢는 천둥번개가 쳤다.
간신히 비도 멎고 천둥번개도 사라진 뒤 사람들의 눈에 띈 것은 빈자리가 된 王座였다.
사람들은 왕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고들 했다.
이렇게해서 생을 마감한 로무루스는 로마인들에 의해 로마의 國父로 추앙되고 神格化했다.
초대왕 로무루스가 죽자 왕위 계승문제가 나온다.
로마인들 가운데는 왕의 권력 증대를 반대해 온 원로원 의원들이 왕을 죽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것은 사실일수도 있음직한 이야기다.
공석이 된 왕위를 있는 것이 당명과제가 된 원로원은 당연히 라틴계 인물을 모색하려 했으나 찾지못하고 기왕에 하나가 된 사비니족 가운데 출중한 인격자가 있어 그를 찾아 제2대 왕에 옹립하기로 한다.
라틴계와 사비니계의 대립으로 견착상태에 있던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사비니계의 누마를 왕에 옹립했다.
원로원의 三顧草蘆로 왕위를 수락한 누마가 장로들과 함께 로마에 들어올 때의 옷차림은 일체 허식을 배제한 神官의 모습이었다. 겸손의 극치라고 해야할 것이다.
시민집회의 찬성을 얻어 정식으로 왕에 즉위한 누마는 그렇다고 神權政治를 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누마는 로무루스의 초빙을 받아 로마에 이주한 동포와는 달리 祖上傳來의 땅에 남아 살던 사비니족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농사를 짓는 한편 지식탐구에도 게으르지 않은 인격자였으며 高邁한 인품과 교양인으로서의 德望은
로마에까지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로마의 왕은 왕 스스로가 神인 이집트의 파라오와는 다르다.
신과 인간 사이를 잇는 神官 색채가 농후한 메소포타미아의 왕과도 다르다.
豪族의 수령이라는 느낌을 주는 그리스의 왕과도 물론 다르다.
로마의 왕은 신의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다.
공동체의 뜻을 體現하고 그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終身이기는하지만 결코 世襲은 허용안된다.
그뿐 아니라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로무루스에게도 자식이 있었으나 왕위를 계승해 2대 왕이 된다는 따위는 로마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왕이라기보다 종신 대통령쯤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歷史家 리비우스는 <로마史>에서 누마의 업적을 기술하며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이제까지는 폭력과 전쟁에 의해 기초를 닦아온 로마에 법과 습관을 개선해서 국가를 확립하려고 했다."
尙武精神이 강했던 당시 로마인에 인간따움의 禮節을 가르치고 스스로의 힘의 한계를 앎과 동시에 그것을 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르치려고 했다.
문이나 출입구의 守護神으로 전쟁의 神이기도한 '야누스'에 바칠 神殿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들문과 날문이라는 의미인지, 반대방향으로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야누스상을 모신 신전의 앞 뒤 출입구를 사람들에게 보여 이 출입구의 문은 전시에는 열어놓고 평화시에는 닫도록 일렀다.
이 문은 누마가 로마를 통치한 43년가 닫친채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문은 누마의 사후 줄곧 열린채 세월이 흘러 BC.240년 제1차 포에니戰役(한니발 전쟁) 종료 후 잠간 닫혔다가 곧 열려 유리우스 카에사르의 사후 내란으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의 연합군에
승리한 BC.31년에 간신히 세번째 닫혀젔다고 한다.
우리가 이중성을 가진 자를 빗데 야누스라 비하하는 표현은 여기서 유래한다.
누마는 로마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나누어 각기 독자의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하도록 정했다.
목공조합, 철공조합, 염새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이 직능단체의 결성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하기보다는 라틴系대 사비니系의 사람들의 부족별 대립을 막고자 함이 더 큰 목적이었다.
당시의 로마에는 이 두부족 말고 여러부족들이 유입되어 살았다.
기술력이 좋은 북쪽의 에토루리아인들도 그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건국 당시부터 多民族國家였던 것이 로마였다.
민족간 마찰의 방지 없이는 국가로서의 기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炯眼의 누마왕은 사람들의 일상에 질서를 주기 위해 달력도 개혁했다.
우리의 세종대왕이 로마의 누마왕에 비견되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배와야할 누마왕의 업적은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아 다음 연재에 이어가기로 한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