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7,카에사르-폼페이우스간 세기의 대결 (5)

BC.5세기경의 그리스지역 아테네 최성기의 판도, BC.48년의 파르살루스會戰場은 지튼 색의 테살리아지방 중부에 위치한다.
會戰 실황중계(하)
BC.56년 카에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3者에 의한 루카회의에서 3頭政治로 출발하며 맺어진 두 명장간의 서약은 12년만에 파기되고 常勝將 폼페이우스는 로마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권력의 무상함을 2천년 전 로마사가 주는 교훈에서 또 배운다.
카에사르도 폼페이우스가 비열하게 버리고 간 권세의 상징을 눈앞에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느꼈으리라.
폼페이우스의 陣營을 둘러본 카에사르는 병사들에게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하고 적이 두고간 물품에 손대지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곧바로 진영지 뒷문으로 탈출해서 북쪽으로 향한 폼페이우스 뒤를 쫓았다.
그러나 추격대가 거져온 것은 폼페이우스는 라리사에도 머물지않고 동쪽 50킬로 멀리 해변으로 달아났다는 보고였다. 그를 따른 자들은 라리사로 도망한 30騎뿐이였고 그
중에는 장인되는 스키피오에 전녀도 執政官 렌토울스와 마르케루스의 얼굴도 있었다.
카에사르는 이 보고를 받기 전에 적 잔존병 처리에 손쓰고 있었다.
도망간 적병 다수는 개천을 건너 가까운 산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이것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수비가 견고한 라리사로 도망칠 위험이 있었다.
그는 4개 군단 병력을 이끌고 개천을 건너 적이 도망쳐간 산으로 달렸다.
시각은 이미 땅거미가 스며들고 있었다.
병사들에 고지와 개천 사이에 壕를 파게하고 병사들을 격려하며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저들에게 물을 끊어서 피를 흘리지 않고 항북을 받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밤새 파낸 호가 완성된 것은 해가 주위를 하얗게 떠올리느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였다.
목이 타 절망한 패잔병들이 결국은 손들고 고지를 내려왔다. 카에사르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항복한 전원에 무기를 버리라고 명하고 발밑에 엎드려 존명을 泣訴하는 자들을 이르켜세워 포로가 된 그들에게 예의 寬容의 정신에 따라 간략한 연설로 용서를 했다.
곧 이어 전원에 거취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항복한 적병은 모두 2만 4천명에 달했다.
이어 카에사르는 아군병사들에게는 포로 학대를 엄금하고 휴식을 취한 다른 4개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 뒤를 추적했으나 패장은 이미 小麥수송선을 징발헤서 에게海 동쪽으로 해상도주한 뒤였다.
일단 파르살루스평원에 돌아와 善後策을 강구 할필요가 있었다.
세기의 대결에서 패한 폼페이우스측 전사자는 6천에 포로 2만 4천이었다.
격전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지만 카에사르군의 희생은 2백에 불과했다.
그 소수 가운데는 카에사르의 명예회복에 決死를 맹서하고 최선봉에 섰던 百人隊長 크라스티누스도 있었다. 안면에 칼을 맞아 유혈이 낭자한채였다.
자유방임된 포로 중에는 카에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로부터 죽이지말아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받은 37살의 그녀 아들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있었다.
말단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에게 브루투스에 해 끼치지말라고 지시한 카에사르에 포로 중에 그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브루투스는 폼페이우스측 고위들과 행동을 같이하지않고 이후 카에사르에 충성을 다짐했다. 후에 특혜를 받아 출세하고 배반을 하지만...
파르살루스회전이 세계전사상 유명한 것은 폼페이우스군의 군단기가 아홉, 대대기 중대기가 백 71기 도합 백 80기의 軍旗를 노획한데서 찾는다.
후대 사가들과 군사전문가들이 카에사르의 전과를 평할 때 교과서적 전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또 전쟁의 성격을 엄격히 구분해서 싸왔다는데서 특징을 찾는다.
파르살루스회전은 알렉산더나 한니발이나 스키피오가 승리를 거둔 회전과 비교하면 패자측의 전사자 수가 이상하게 적다. 절대수가 적을 뿌만 아니라 포로 수가 전사자 수를 훨씬 상회하는 유일한 회전이었다는데 주목 할필요가 있다.
보병 4만 7천에 기병 7천, 계 5만 4천의 전체에 대해 전사자 6천과 포로 2만 4천을 제하면 2만 4천이나 도망을 허용했다는 결론이다. 도망병 수도 4대회전 중 가장 많다.
그렇다면 카에사르의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선대 세 명장들에 못미친다는 이야기냐?
알렉 한니 스키의 전술은 오늘날 세게의 많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술교본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카에사르는 없다.
강단에서 알렉산더 한니발 스키피오가 열강을 할 때 카에사르는 이랗게 질문할 것이다.
사람끼리 다투는 일이 어디 교과서대로만 되는가.
그렇다면 <적과 전장을 보여달라. 그러고나서 이기는 전법을 말하겠다>
이 말은 필자가 중학생시절 국군 창설이 항창일 때 미군 교관의 질문을 받은 당시 金錫源 대령(일군 계급)이 한 말이라고 들어 알고 있다. 敵情도 모르고 무슨 작전을 짜느냐는 것이다.
선대 세 장군은 회전방식을 창안해서 그것을 구사하여 이긴데 대해 카에사르만은 방식대신 임기응변으로 이겼기 때문에 교재로 채택 할 수가 없을뿐이다. 방식은 萬人共通이어야하기 때문이다.
말이 잠시 본론을 벗어났었다.
이 싸움에서 적이 죽은자보다 살아 도망간자들이 몇배 많아다는 것은 카에사르의 전쟁성격을 반영한 결과였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즉, 같은 국민간의 싸움에서는 가급적 살상을 피하겠다는 의지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폼페이우스와는 다른 도우라큠 기지로 도망한 적의 고위급은 다수가 살아서
동족간 싸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에사르의 동화 관용 정책은 결국은 자기 희생을 거져오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