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훈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마史Digest 帝國篇-74-
* 슬플 때는 남자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는 수밖에 없다는 哲人皇帝 통치 하의 로마제국은 행복했다
| 5th Emperor of the Roman Empire |

|
|
11 July 138 – 7 March 161 |
|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from birth to adoption by Hadrian);
|
하드리아누스황제에 의해 15대 황제에 오른 안토니누스. 철인황제의 호칭으로 치세 23년간 제국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기원138년 1월 24일, 62회 생일을 맞은 하드리아누스는 티보리의 별장에 단 한 사람 안토니누스만을 초청, 養子 입양을 제의했다. 당년 52세로 원로원 의원이며 내각의 일원이던 안토니누스는 한 달간 숙고끝에 양자입양을 받아드렸다.
이렇게해서 제15대 황제에 오른 안토니누스는 哲人皇帝로서 先帝 하드리아누스로부터 전쟁을 빼고 평화속성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 태평성대를 누리게된다.
안토니누스의 공식명은 Imperator Caesar T. Aelius Hadm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 남불 나르본시스屬州 지금의 니므市 출신으로 증조부 代에 이탈리아로 이주해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 집정관을 역임한 재산가의 이민 4세이다.
아무 혈연이 없는 그가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발탁되게된 공식 계기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治世 21년 간 17년을 제국순방으로 로마를 비운 오랜 기간에도 내각의 일원으로 통치행정에 차질을 빚지 않은 공을 샀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한편, 군경력이 전무한 안토니누스를 후계로 지목한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안목은 제국 방위체제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통상의 평시 행정만으로도 제국 통치가 가능하다고 본때문이었을 것이다.
최고권력자가 되면 보통 측근을 비롯해서 협력자들을 교체하는 것이 상례이나 안토니누스는 심지어 근위군단장까지도 본인이 사의를 표 할때까지 20년이나 유임시켰다.
어느날 처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자린고비짓에 화가 나 바가지를 긁었다.
황제의 대답은 이랬다.
<참 바보같으니,제국의 주인이된 지금은 이전에 소유하던 것들에 대한 주인도 아니라는거야>, 덧붙여 <국가의 소유로 귀속시켜야할 재산을 필요하지도 않은데 소비하는 것처럼 야비하고 비루한 행위는 없어>
안투니누스는 황제 즉위 축하 일시하사금(conginarium)으로 전임자들처럼 황제금고에 손대지않고 私財를 털었다. 17세 이상 시민권자 20만과 군단병 16만 8천, 계 36만 8천명에 1인당 75데나리우스씩, 총 2천 7백 60만 데나리우스를 지출했다.
이렇게 어디하나 나무랄 데없는 완벽한 인격자는 자칫 숨막히는 존재이기 쉬우나
언토니누스의 언행에는 항상 온화한 유우머가 흐르고 있어 그로하여금 경원할 수없는 존재로 만든다.
황궁에서 동맹국이나 지방군주 또는 속주의 유력인사초청 향연에 내는 음식도 자기 소유지산의 야채나 고기 생선 요리가 전부이다. 접씨마다 하나하나 어느 농장산이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포도 수확기가 되면 많은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공무를 중단하고 별장으로 가서 짧은 옷으로 갈아입고 농민들과 함께 일하고 포도주가 익는 숙성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는다.
참 신사에게서는 언행의 품위와 온화함을 뺄수없다.
질책을 할 때도 그런 자세를 흐트려서는 안된다.
언젠가 아버지 황제는 미래의 철인황제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정교사의 죽음 앞에 울고있는 것을 보고 타일렀다.
<감정을 억제하는데는 賢者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아무 소용 없는 때가 있다.
그럴때는 사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는 수밖에 없다>
카르타고인이면서 하드리아누스로부터 미래 황제를 계승할 젊은이의 교육을 부탁받은 철학자 프론트는 그 젊은이가 성장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란 이름으로 제위에 오른 후 지금은 고인이 된 하드리아누스와 언토니누스 두 사람을 비교해서 쓴 편지를 제자 앞으로 띄웠다.
<하드리아누스에는 아무래도 친밀해지는 정이 가지 않았다.
그와 마주 할때는 명석한 사람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짝 조심했다.
마치 戰爭神 마르스가 冥界의 신 풀턴 앞에라도 나온듯한 긴장감이 돌았다.
왜 그오같은 생각이 드는지?
사랑의 정을 품느는데는 자신감과 친밀감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친밀한 감정이 토하지않고때문에 그의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 자신이 서지않았다.
나는 그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사랑의 정을 느꼈다고는 말할 수없다.
그런데, 안토니누스는 내가 태양을 사랑하는 거처럼 달을 좋아하는 것처럼 아니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을 사랑하는처럼 좋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친밀한 정을 느꼈듯이 그도 나를 사랑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고 늘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로마에 진출해서 변호사로 성공한 플론트가 제위 승계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가정교사를 맡은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말년 138녀이었다.
위 편지의 글에서 보듯이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의 성격 차는 확연했다.
그러나 둘은 養父子의 인연을 맺고 최성기의 로마제국을 인계인수했다.
평온한 제국을 인수한 안토니누스황제는 행운과 행복한 23년을 보내고 기원161년 봄
로리오의 별장에서 '국장을 너무 장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누을 감았다. 형년 75세였다.
로마인은 노령의 죽음은 자연스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亡者에 대한 슬픔은 오직 육친들의 것일뿐, 남들은 슬퍼하지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안토니누스의 죽음은 젊은이의 죽음이라도 되는듯 원로원은 물론 이탈리아 시민 모두 그리고 속주민까지 애도의 물결로 제국이 술렁이었다.
참 <國父>의 죽음을 슬퍼한 것이다.
우리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가 '그랬잖은가' 라는 생각을 지을수가 없다.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