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마史Digest 帝國篇-73-
*예루살렘은 로마식 도시로 재건되고 교조적 유다교도는 Diasporo로 전원 추방되다
15세기에 쓰인 <황제전> 필사본의 모형도.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교도의 추방명령을 내리고 있다.
공화정 말 폼페이우스에 의한 유다(猶太) 정벌 이후 2백년 간 때로 충돌은 있었으나 유다교도에 대한 로마의 일관된 관용정책에는 명확한 조건 하나가 있었다.
多神敎의 로마세계에서 一神敎를 인정하고 割禮 습관을 비롯해서 제국의 공무나 군무에의 불참은 물론 남이 일 하는 토요일을 휴일로하는 생활습관 등 등 그들의 관습 모두를 인정해주는 대신 제국의 통치에 대한 반항행위만큼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현 요르단 아라비아屬州 한가운데 둘러싸인 땅의 유다민족은 모두가 神政國家 건설을 절규하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로마에 반항해온 것은 아니다.
도시란 도시는 반드시 유다인 거주구가 있게마련인 그들의 離散 경향은 강했으며 이들 동방 도시에 사는 유다인은 같은 도시민 그리스계 주민과도 충돌을 자주 빚어왔다.
選民사상이 강한 유다인의 반란은 외지 거류민보다 타문명과 접촉이 적은만큼 유다의 순수성이 짙은 본국 특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상례였다.
하드리아누스황제가 128넌 동방으로 떠나 3차 제국순방에서 그리스 시리아 요르단을 순방 중 유다에 반란이 일어나 로마는 또한차례 유다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없이 되었다.
유다인의 할례 금지와 예루살렘 근교에 로마 神殿都市 건설이 도화선이 되어 유다 敎條主義자 바르 코쿠바와 라비 아키바에 의해 기원131년에 도발된 3차 유다전쟁은 로마군 4만의 병력이 투입되어 134년 에루살렘 함락으로 종식되었다.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64년 전처럼 잿더미가 되었고 전국 9백 85개 마을이 불길에 사라졌으며 50만의 유다인이 戰禍에 휩쓸려갔다.
살아남은 유다인은 가축보다도 싼값에 노예로 팔려갔고 가자지구에 보내져 자기들이 파괴한 마을의 재건작업에 혹사당했다.
그러고도 저항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예루살렘 남서쪽 베테르市가 기원2세기의 마사다(64년 전의 최후 저항도시)가 되어 136년까지 최후 저항하다 지도자 코쿠바는 전사하고 아키바는 붇잡혀 고문끝에 죽었다.
베테르에서 저항의 마지막 불이 꺼진 기원136년 9월26일이 공교롭게 기원70년 2차 유다전쟁 당시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과 일치한다는 것이 유다민족의 비극이 숙명적이라는 嘆辭가 나왔다.
5년의 지구전에서 로마군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나 기록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시찰도 순방도 단념하고 카에사리아의 전선사령부에 2년 반 칩거한 하드리아누스도 지쳐있었다.
남에게 일임하기보다 지접 챙기는 성격의 하드리아누스는 전후처리만큼은 직접 나섰다.
유다(Judae)는 이미 유다라 불리지 않고 공식 팔레스티나(Palestina)로 부르게 되었다.
예루살렘 이름도 없어지고 아에리아 카피톨리나의 로마名으로 바뀌었다.
도시 재건도 로마식대로 남북으로 관통하는 지금의 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門에서 시작되는 中央通도 유다민족에게는 최대의 적인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손에 의해 만드러진 것이다.
유다교인들에게는 聖都인 예루살렘의 현재 모습은 유다교도의 반란을 근절하는데 누구보다도 과격한 수단을 쓴 사나이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그것은 기원134년에 종결된 유다민족의 반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교도의 전면 추방을 명한 하드리아누스에 의한 유다인의 離散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이라는 말에는 '종자 뿌리기'라는 좋은 말뜻도 있지만 예부터 유다인이나 그리스人에게는 디아스포라의 경향이 강했다.
이익이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주해 사는 특성을 지닌 그들은 타민족이 건설한 곳에 들어와 그들 만의 주거구역을 만들고 타민족을 배타하는 기질이 강해 이웃과 잦은 충돌을 빚으며 살았다.
자발적으로 이주해 사는 한 이산은 강제가 아니었다.
강제 디아스포라라면 BC.700년 앗시리아에 의한 이주가 첫째이고, BC.600년 전후의 바빌로니아에의 강제이주<바빌론의 포로>가 있다.
더 옛날,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유다인을 인솔하고 조국 귀환을 달성했다는 Exodus모세의 고사도 있다.
그 이후 없던 강제 이산을 하드리아누스황제가 감행한 것이다.
앗시리아나 바빌로니아가 우수 노동력을 탐내 그랬던것과는 달리 하드리아누스의 이산은 이산 목적지 없이 예루살렘 거주만을 금지했을뿐 각자 마음대로 살곳을 찾아 떠나라는 이산이었던 것이다.
유다인 전원의 추방이 아니라 교조적 유다교도에 한한 추방이며 단 예루살렘에만은 살지말라는 조치였다. 예루살렘이 교조주의자들로 인한 反로마 화약고였기 때문이다.
기원117년 즉위해서 138년 7월, 62세에 자기 설계의 로마 근교 바닷가 바이아별장서 병사하기까지 21년 治世 중 連 17년 간이란 장기간을 제국순방으로 제국을 통치한 황제는 로마사상 하드리아누스가 유일했다.
그는 史家들에 의해 지혜롭고 현명한 5賢帝 중 로마제국의 最盛期를 이룬 최선의 황제로 꼽힌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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