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史Digest 帝國篇-71-
*파르티아王과 정상회담으로 전쟁 피해 평화유지하고, 2찬 제국순방 강행
A Roman coin celebrating the province of Africa, struck in AD 136 under the Emperor Hadrian. The personification of Africa is shown wearing an elephant headdress.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죽기 2년 전 136년에 주조한 동화와 코끼리 머리장식을한 아프리카의인화한 동전
스페인 체재중의 황제에 파르티아왕국에 불온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시리아屬州 총독으로부터의 긴급 보고가 전해졌다.
스페인주둔군 검열을 마친 하드리아누스는 외교도 방위의 중요수단으로 믿고 현지 출동을 결정, 선편으로 지중해를 횡단하여 시리아에 직행했다. 123년 봄이었다.
황제를 맞은 시리아속주 안티오키아는 파르티아전쟁이 언제 일어나도 좋을만큼 임전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파르티아왕과의 수뇌회담으로 해결을 찾기로 했다.
회담 장소 유프라테스江의 작은 중지도에 군단병도 동행하지않다.
파르티아왕의 의중을 충분히 간파한 황제의 대담한 결정이었다.
수뇌회담의 상세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위기는 피할 수있었고 로마제국령 侵攻인가고 로마가 우려했던 파르티아군은 본국으로 돌아간 왕의 명령으로 해산했다.
파르티아의 역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합리적 대화가 통하는 로마제국이 안니라 왕실내의 권력투쟁과 파르티아 동북방의 아시아高地民의 내습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정확한 상황판단으로 수뇌회담의 유효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파르티아문제를 간단히 해결한 황제는 소년시절부터 동경해온 아테네를 48세가 되어서야 처음 방문하게된다.
도나우강방위선, 라인강방위선 그리고 파르티아방위선을 모두 검열 재정비하고 겨울이 다가오자 남쪽으로 발길을 돌려 아카이아屬州의 수도 아테네에서 越冬할 계획이었다.
한니발戰爭 당시 彼我 구분을 위해 수염을 깎은것이 관례가되어온 로마인으로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처음으로 턱수염을 기른 황제로 알려져있다.
턱수염을 기르는 관습의 그리스인을 담고싶어서이기보다 관능적으로 보이는 것이 좋아서였을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방문 전부터 턱수염을 길러왔다.
그는 마치 처음 해외여행을 하는 젊은이처럼 그리스적인 것은 모조리 경험하고 다녔다.
아테네시내는 물론 델피, 코린트, 스파르타, 올림피아 등 명소 유적지들을 빼지않았고 스니온갑(岬)에 서있는 海神 포세이돈神殿에서 해돋이 감상도 잊지않았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쇠락해가는 아테네를 재활시키고자 아테네 건국의 아버지 테세우스를 기리는 구시가의 대대적 보수작업을 명하고 대조적으로 하드리아누스 신시가 건설을
추진했다.
6개월의 단기간에 완성될 사업이 아니었으므로 언젠가 다시와서 완성된 신도시 모습을 보고싶었다.
6개월 체재 중 충분히 그리스를 감상한 황제는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브린디시가 아니라 시칠리아島로 키를 잡았다.
시칠리아는 원래 그리스移民들이 세운 도시가 많은 지방이다.
그리스語와의 이중국어노선을 취한 로마의 방침으로 좁은 메시나海峽을 사이에두었음에도 이 섬이 로마제국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그리스어가 통했다.
특히 섬 동반부는 원래 Magna Graecia <大그리스>라 불린 일대로서 시라쿠사, 타오르미나,메시나 등 그리스 식민지起源 도시가 많다.
기원전 로마와 카르타고의 시칠리아 쟁탈전쟁시 유명한 그리스계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항전은 눈부신바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그 섬 시칠리아까지 초도 순시한 제1차 제국순방을 마치고 수도 로마에 귀환한 것은 125년 가을의 문턱, 출발로부터 4년 반만이었다.
귀환 즉시 <Adventui Augusti Italiae>란 황제의 이탈리아 귀환 표제의 銀貨를 발행해서 시민에 황제의 귀국을 알렸다. 황제의 온존을 믿고 생활의 여유를 찾는 시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다.
그것만으로 대중은 이해해 주지않자 황제는 수도 로마의 일반시민에게 1,835조가 겨루는 大劍鬪士 시합을 주최해 장기 시찰여행에서 돌아왔음을 확실히 어필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 누구도 생각못한 2차 제국순방이 겨울이 가고 이듬해 126년 봄에 시작된다. 50세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택한 길은 아프리카였다.
로마를 뒤로한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오스티아港에서 카르타고행 뱃길을 잡았다.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소금까지 뿌려 불모지가된지 3세기가 지난 지금의 카르타고는 카에사르에 의해 복구의 첫삽이 뜬지 백 60년 지난 현재 로마제국의 어엿한 도시 하나로 번영하고 있었다.
카르타고를 수도로하는 북아프리카屬州는 로마화가 오래고 안정된 속주를 의미하는 <원로원속주>의 하나로 카르타고에는 갈리아의 리용과 같이 5백명의 수비병만 주둔시키고 있다.
砂漠民의 습격에 대비한 장대한 방위선을 담당하는 군단 기지는 서쪽 이웃 누미디아屬州에 두고 있어 카르타고에 오래 체재할 필요는 없었다.
황제는 북아프리카에 그물망처럼 부설된 로마街道를 통해 현 알제리의 란베즈에 들어갔다. 아프리카방위선을 지키는 주전력 제3 아우구스타軍단기지를 시찰하기 위해서다.
이 란베즈에서 발굴된 紀念柱(현재 루브르미술관 소장)에 새겨진 부조에서 하드리아누스의 음성을 지금도 들을 수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실전을 방불케하는 연습에 참가한 제3 아우구스타군단 전원과 제2 히스파니아騎兵團 그리고 속주민 보조군단 앞에서 행해지는 황제의 연설이 천 9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들려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라벤즈軍團基地에는 키레나이카에서 모리타니아까지 전선 전체의 지휘관이 소집되어 방위력 강화에 대한 문제 전반이 토의되고 시정조치되었다.
로마는 아프리카전선에 한하지않고 제국방위 全전선에 걸쳐 똑같은 접근방법으로 전선강화조치를 취했다. 한편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하드리아누스의 시찰여행은 우선 군단기지 방문 다음은 속주민 거주 지방자치체도 어김없이 방문하여 생활편의시설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은 보완해주는 것이 통상이었다.
현대에도 훌륭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튀니지와 리비아 북부 레프티스 마냐(Leptis Magna)를 마지막 방문지로하고 벳길로 수도 로마에 귀환했다. 기원126년 봄부터 시작된 2차제국순방은 아직 여름이 다 가기 전의 짧은 기간의 강행군이었다.
이로부터 1년 반, 하드리아누스는 수도와 본국으로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이 기간 중 아마도 로마法의 集大成 대작업이 착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황제들의 절대권력 하에 네르바에서 코모두스황제까지 백년간 제국의 최성기를 만끽한 제국민들은 최상의 번영과 행복을 누렸다고 19세기 영국사가 기번(Edward Gibbon)은 저서 <로마제국의 쇠망사>에 주저없이 쓰고 있다.
--계속--
p.s:전회 帝國篇-69-는 -70-의 오기였음을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