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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7-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파르티아遠征 그리고 治世 20년의 끝
Aureus issued by Trajan to celebrate the conquest of Parthia.
기원116년 파르티아정벌기념 황금주화
기원113년 10월 27일 로마를 뒤로하고 出征한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파르티아원정에는 다키아전에 참전했던 대부분의 군단참모들이 함께했으나 단 한 사람 리키니우스 술라가 빠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황제가 때로 자제력이 모자랄 때 곁에서 서슴없이 직언해서 황제의 부족함을 채와주던 술라였다.
史家들은 만약 술라가 살아있었다면 트라이아누스는 파르티아원정을 실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할만큼 황제를 위한 술라의 역할을 평가받는 인물이었으나 그는 다키아전 직후 타계했던 것이다.
트라이아누스는 자기에 心醉한 유능한 무장들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도자가 유념해야 할것은 心醉者란 때론 본인보다도 당면 사안에 더 과격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현실이다.

Parthian Empire
현 이란과 이라크에 해당하는 전성기의 파르티아제국
동방방위군 7개군단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트라이아누스는 정예 서방방위군 1개 라인강군단과 2개 도나우강군단을 추가, 파르티아전선으로의 이동을 명령했다. 가까운 이집트 주둔군을 제쳐두고 멀리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부터 증원군을 부른 것은 오리엔트 출신자들이 많은 동방군단보다는 다키아정벌에 직접 지휘한 서방군단에 더 신뢰가 갔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현지 방위군을 남겨두고 원정군에 합류한 총병력은 주전력 로마군단병 5만 5천, 여기에 주둔지 출신 보조병력 5만을 합해 10만 대군으로 편성되었다.
기원114년 봄, 38세의 하드리아누스(다음 名황제가 됨)에 후방 방위책임을 지우고 원정군은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를 뒤로했다.
원정군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현 터어키의 마라티야, 아르메니아령의 최전선기지를 향해 유프라테스江 상류에 도달했다. 거기서 다시 로마가도를 북상하여 사타라(현 터어키 켈키트)에 도착, 도나우강에서 이동해오는 서방군단 선발대와 합류했다.
트라이아누스는 이 기지에서 주변의 왕과 부족장들을 소집, 전원이 로마황제의 소집에 응했으나 아르메니아의 새 왕 파르타마시리스의 모습이 안보였다. 전군은 아르메니아령내로 진격했다.
트라이아누스는 에레게이아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아르메니아왕 바르타마시리스를 만났다.
소집에 응하지 않은것은 전 왕의 방해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戴冠의 권리는 로마황제에 있음을 인정한다며 쓰고있는 왕관을 벗어 트라이아누스 발밑에 내려놓았다.
이에 트라이아누스는 일갈했다.
로마황제와 상의 없이 파르티아 왕이 멋대로 아르메니아 왕을 결정해도 된다는 네로황제의 협정에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면서 파르타마시리스와 수행원 일행을 퇴장시켰다.
아르메니아 왕 참칭 일행은 로마군 전선사령부를 나와 얼마 안간 곳에서 전원 처형되었다.
보고를 받은 트라이아누스는 즉석에서 카파도키아(현 터어키)와 아르메니아를 통합해서 一屬州로 하고 새 속주 총독에 집정관 경력의 카티루스 세베루스를 임명했다.
이제 파르티아王家의 파르타마시리스를 죽인 마당에 파르티아도 가면을 벗어던지고 정면대결로 나온다.
로마군단장들은 각기 맡은 군세를 이끌고 아르메니아 전역으로 산발 돌진했다.
전공 다툼이 치열해지고 루시우스 퀴투스장군의 騎兵團의 활약은 눈부셨다.
로마세력권의 경계로되어있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티그리스강 상류 일대를 석권했다.
그해 여름 일찍 일대의 주요 도시 니시비스(현 누사이빈)이 함락되고 메소포타미아 북부(현 터어키 시리아 이라크
3국경지대)는 모두 로마군 수중에 들어왔다.
로마에 전황이 전해지자 수도는 환희에 찼다.
트라이아누스는 사양해온 <OPTIMUS Princeps,至高의 皇帝> 존칭을 수락한다고 원로원에 전했다.
중동 내륙에 잠간동안의 가을이 가고 길고 지루한 겨울이 다가왔다.
장병들과 함께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트라이아누스 황제도 지방 호족의 객으로 현지에서 월동을 했다.
정벌 2년째인 115년 봄부터 가을에 걸쳐 로마군은 다시 동과 남으로 제패 윤곽을 넓혀갔다.
트라이아누스 자신도 티그리스강까지 진출, 거기서 제패가 완료된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로마의 속주로 추가했다.
이렇게해서 로마제국의 오리엔트 영역은 흑해에서 유프라테스강이 아니라 카스피해에서 아르메니아를 거쳐 티그리스강을 따라 홍해에 이르는 선으로 동남진했다. 황제는 인도와 국경을 마주할 의사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몇 해 전 인도에서 로마에 사절이 와서 트라이아누스와 회담한 기록도 있다.
중국으로부터도 사절이 로마를 찾아왔었다는 연구자들의 주장도 전해진다.
戰果에 만족한 트라이아누스는그해 겨울은 부인과 조카딸이 함께와서 기다리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런데 마침 트라이아누스가 체재 중인 안티오키아에 지진이 엄습해서 황제도 가벼운 부상을 입는 불운을 만났다.
트라이아누스는 미신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흉조라고 생각하는 자가 적지않았다.
일찌기 앗시리아와 바빌론이 위세를 떨친 지방에 로마의 대공세를 목표로 내건 기원116년, 봄을 기다려 안티오키아를 뒤로한 트라이아누스는 남하해온 군을 이끌고 동쪽을 향해 티그리스강에 다달았다.
파르티아왕국 수도 크테시폰(Ktesiphon)공략이 목표였다.
4백년 전 알렉산더대왕이 밟은 東征 진로와 일치한다.
현 이라크수도 바그다드로부터 40킬로 남쪽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이 쉽게 함락되고 왕 오스로에스는 함락 전에 도망해 로마군 수중에 들어온 것은 황금옥좌와 왕녀 하나였다.
황제는 크테시폰 함락 직후 참모들과 함께 멀지않은 고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말했다.
<젊었으면 인도까지 진군했을텐데...>
파르티아함락 승전보가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 의원들은 작약했고,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마음껏 개선식을 거행해도 좋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트라이아누스는 과거 황제는 물론 어느 군단장조차도 밟아보자못한 페르시아만에 발을 내딛었다.
페르시아만이 로마의 패권 하에 들어오면 오리엔트 통상로는 흑해, 페르시아만, 홍해 등 모두를 로마가 수중에 넣게된다.
파르티아왕국은 전제군주국가이긴하지만 강권을 쥔 왕 밑에 관료체제가 갖춰진 왕국이 아니라 각지방에 할거하는 호족을 왕 하나가 거느리는 형태의 호족집단국에 불과하다.
왕가 후계문재로 내분이 일어나면 각지 영주들간에도 제편 인물을 왕에 옹립하려는 타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스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大王의 東征으로 패망할 당시 다리우스王의 페르시아왕국과는 국가조직 형태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도망 중의 왕 오스로에스와 제후들 간의 提携라는 뚜렷한 기록이나 증거는 없으나 제패한 땅에 체류해있던 로마군에 대해 파르티아측은 게릴라전법으로 도발해왔다. 파르티아왕국의 존망위기여서라기보다 제후 하나하나가 자기의 존망위기를 느껴서였기 때문이었다.
정규군은 이기지 않은면 지지만 게릴라는 이기지 않더라도 지지는 않는것이 게릴라전법의 특징이다.
게릴라전술로 군단자까지 전사하는 무시못할 피해를 겪는 보고가 안티오키아에 체류 중인 트라이아누스에 전해지고 메소포마미아 全域이 봉기의 불바다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햇다.
안티오키아의 시리아속주총독 관저에서는 대책회의가 거듭되었으나 묘책이 나오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명예를 걸고 대반격을 주장한 것같으나 트라이아누스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다만 알려진바는 이제까지 病을 몰랐던 황제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뿐이다.
그것도 63세 나이의 트라이아누스의 마음고생의 원인이 파르티아뿐만이 아니라 다른 또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유다의 반란이었다.
一神敎의 유다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이단자들과의 공생을 끈질기게 거부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에 사는 유다인거주구가 게릴라전법으로 로마군에 대항하는 파르티아인의 후방지원을 맡고 있었다는 연구자들도 있다.
유다 땅에서 발발한 반란의 불길은 제국 내부에서도 이집트로, 키레나이카로, 그리고 키프로스島로 번져나갔다.
급파된 젊은 무장 툴보군단의 활약과 그리스계 주민의 협력으로 이집트와 키레나이카에서는 유다인 반란이 진압되었으나 키프로스도에서는 비유다족으로 보이는 사람은 마구잡이로 죽이고 로마시민권 소지자들을 원형투기장에 가두고 살해하는 등 참극이 극에 달했다.
파르티아정벌군 제7크라우디아軍團을 진압군으로 보내고서야 겨운 진정되는듯싶었으나 반란의 완전진압은 아니었다.
파르티아 서쪽 일대에 확산된 게릴라를 완전 제압할 해였어야할 기원117년의 봄이 왔는데도 트라이아누스는 東進을 하지않고 그해 7월 말이 되어 안티오키아를 뒤로하였으나 행선지는 서쪽의 로마였다.
중병의 황제가 아내 프로티나와 조카딸 마티디아가 간병하는가운데 태운 황제의 배는 서쪽으로 선수를 튼 것이다.
파르티아전 총사령관에는 후임 황제가 될 前記한 바, 38세의 무장 하드리아누스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쪽을 향한 해로여정도 길지않았다.
小아시아의 남해안을 항해 중 트라이아누스의 병세가 악화하여 가까운 세리누스港에 정박, 병세의 호전을 기다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기원117년 8월 9일,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눈을 감았다.
향년 64세, 治世 20년의 마감이었다.
숨을 거두며 토하듯이 하드리아누스를 후계로 지명했다.
간소한 화장 후 유골함에 담긴 황제는 아내와 조카딸과 근위군단장 아티아누스에 의해 로마로 항로를 잡은 배에 실려 대망을 가슴에 품고 勇躍 東征을 떠난지 4년만의 귀환길이었다.
귀국한 황제를 시민도 원로원도 葬禮式 아닌 승리의 凱旋式으로 맞이했다.
4두의 백마가 끄는 전차에 탄 주인공은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유고함이었다.
사자가 주인공인 개선식은 869년의 로마의 역사에서도 처음이었다.
평판이 좋았던 황제인지라 트라이아누스의 초상은 천 9백년이 지난 현대에도 그의 업적과 함깨 많이 남아있다.
말 그대로 盡人事待天命한 트라이아누스, 그는 어찌 그리도 열심이었나?
대답은 차라리 간단한지 모른다.
<속주출신자로 첫 로마황제였기에......>
걸핏하면 나오는 대답. <여자로는 처음이니까>
국제무대일 경우 <한국사람으로는 처음이니까>
트라이아누스 황제 이야기 4편을 쓰면서 내가 얻은 답은 그게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이다.
--계속--
사족:나는 로마사를 처음 쓸 때 한국의 현실정치에 혐오를 느껴 혁명적 발상에서 이 글을 쓴다고 했다.
쓰면서 한국의 현실을 2천년 전 로마의 현실에 투영해 보면서 좀 나은 정치를 할 수는 없을까 모범을 찾고자했다.
그래서 부쳐진 기둥제목이 歷史敎訓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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