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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6-
*다키아戰後 처리와 평화 건설 그리고 東方의 파르티아遠征계획
트라이아누스의 흉상
정치는 결과로 평가하고 역사는 후세가 더 할수도 덜 할수도 없는 화석으로 존재한다고 했다. 2천년 전의 로마사가 현재에 명암을 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플루타르크는 '로마 융성의 요인은 패자마저도 자기들과 동화하는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있다'고 했다.
카에사르가 갈리아Gallia(현 프랑스 네덜란드지역)를 속주화하고 그들의 전통적 생존방식을 인정하면서 저항없이 로마화에 성공한 원인은 관용과 포용에 있었다.
그러나 그 150년 후 트라이아누스가 다키아(현 루마니아)를 정벌하고 속주화하는 방법은 달랐다.
그는 로마화에 거스르는 다키아인을 철저히 추방하거나 말살하고 무인지경화한 다음 주변 지역으로부터 언어 문화가 다른 이민족들을 이주시켜 혼성사회를 만들어 속주화했다.
카에사르와 트라이아누스의 속주화방식은 정반대였으나 결국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카에사르 이후 아우구스투스까지 20년 내전을 치르는 동안 갈리아가 로마에 한번도 불온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다키아 장벌 150년 후 찾아오는 북방 蠻族의 로마 대침입시까지 다키아가 로마의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해준 것도 같은 맥락으로 평가된다.
카에사르는 암살되었으나 그의 생각은 후계자들에 이어져서 관용과 동화라는 개국노선은 로마제국의 속주 통치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요컨데, 패자도 승자도 로마제국이라는 운명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는 정책이 정착된 결과였다.
안그러면 애초 패자의 피가 무한히 짙은 스페인 출신의 트라이아누스의 황제 취임같은 일은 있을 수없었을 것이다.
제정으로 이행한 후의 로마는 敵都 낙성 후에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고 주민 전원을 노예화한 카르타고 멸망시와 같은 사태는 두번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트라이아누스는 다키아 주민의 총교체라는 패자 비동하노선을을 강행한 한 것일까.
융성기를 지나 이미 절정기에 있다는 승자의 교만 때문일까.
아니면 5년 전 도미티아누스시대에 맛본 굴욕으로부터 로마인을 해방시켜주고싶어서였을까.
트라이아누스와 동시대 史家 그리스人 플루타크스나 남불속주人 타키투스 아무도 다키아 속주화 방식에 대해 비난은커년 트라이아누스의 정치 전반에 호의적이었다.
다키아 제패로 얻은 이익은 로마제국의 북방 방위선의 확립과 역사적으로 다민족의 용광로라는 특색의 발칸지방의 안정화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동서교역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트라이아누스는 개선식에서 선포한대로 다키아 정벌에서 얻은 전리품 막대한 데케발루스왕의 재화로 대대적 평화사업을 벌인다.
도나우강에 건설된 트라이아누스大橋는 이미 전쟁 수행 중에 완공되었고 민생시설로
일시 3천명을 수용 할수있는 대중목욕탕(Thermae Traiani)이 제1호로 건설되었다.
로마식 욕탕은 단순 입욕시설뿐이 아니라 각종 오락시설도 겸비해서 하루를 일하고 쉬는 로마인들의 운동 독서 등 여가선용을 위한 일대 Amusement Center 역할을 한다.
그 규모가 대단해서 트라이아누스욕장의 경우 정원과 운동장을 포함해 시설이 사방 5백m에 달한다. 이밖에 일시에 벌인 인프라사업이 수 십건에 이르지만 한가지만 더 소개한다.
트라이아누스는 제국의 첫 속주출신 황제다.
한니발의 포에니전쟁 도발로 백년전쟁을 치르고 속주화의 역사가 오랜 이베리아반도 남부 스페인의 베티카속주의 한 작은 마을 이탈리카 태생이지만 황제라고해서 자기 고향에 특별한 시혜를 베풀지 않았다.
로마토목기술의 걸작품으로 2천년 후 지금도 칭송 받는 스페인의 알칸타라橋
다만 스페인 중앙 고지에서 서쪽 대서양으로 흐르는 타호강에 걸친 알칸타라橋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실용성이나 아름다움에 있어 손색 없다. 그러나 자기 출생지를 경유하는 로마가도가 통하는 이 다리도 트라이아누스제가 건설한 것이 아니라 비문에 보면 건설자 율리우스 라켈이라는 사람을 도와 기술자를 파견해 준데 불과하다.
출신지 이익유도를 철저히 배제한 公私 구분이 분명했던 인간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면모를 엿보는 대목이다.
서방과 북방 방위선을 확고히 다진 트라이아누스가 나머지 손대야 할곳은 동방 방위선이었다. 로마와 파르티아Parthia의 관계는 애초 그리스-로마文明과 페르시아文明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아렉산드리아대왕에 의해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했으나 대왕 사후에 생긴 헬레니즘 제국은 그리스인이 지배하는 지중해 가까운 페르시아 서부를 유지하는 데 그쳤다.
그 그리스인을 자국 품에 껴안은 것이 로마인이다.
그까닭으로 로마와 파르티아의 본격적인 접촉이 폼페이우스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의 제패에서 시작되었다.
BC.63년 폼페이우스는 헬레니즘국의 하나인 시리아의 셀레우코스王朝를 멸망시킴으로써 중근동 일대에 로마의 페권이 뻗었다. 헬레니즘국 잔존 유일의 이집트는 이미 사실상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BC.54년 크라수수가 당시 최고 명성을 떨친 폼페이우스나 카에사르에 자극 받아 자기도 파르티아를 제패해서 명실공히 3두정치의 일인자가 되겠는 욕심으로 東征에 나섰다가 무참히 패배하고 전사했다.
이 원정에서 로마군 4만 중 살아 도망한 자가 단 5백명, 2만이 전사하고 1만여 병사가 파르티아에 포로가 되어 변경,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유배된채 거기서 몰살했다.
이 굴욕의 역사를 만회하고자 카에사르가 BC.49 초 원로원 회의서 파르티아 원정계획을 발표했으나 출정일 한 주를 앞두고 공화정파 브루투스 일당에 암살 당해 원정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도 東征했으나 강화조약으로 끝맺았고, 네로는 절세의 명장 코르불루로하여금 정벌에 성공하여 파르티아의 형제국 아르메니아왕국를 속주화하였다.
로마가 방위선으로 간주하는 유프라데스江을 자주 월경하여 팍스-로마나를 위협하는 파르티아를 방치하고서는 로마에 의한 평화가 온전 할수없다는데에 과거 지도자들의 동방정책과 일치한 트라이아누스는 마지막 평화구축으로 파르티아 원정을 결심한다.
기원113년 10월 27일, 트라이아누스라면 성공은 틀림 없다는 시민과 원로원의 기대를 한몸에 안고 황제는 로마를 뒤로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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