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5-
--그럴 사정 있어 한 달 여의 공백을 두고 다시 붓을 듭니다.
.6.13.자 제국편-64-의 '로마皇帝에의 길' 에 이어 첫 屬州 출신이며 5賢帝의 첫 황제가 되는 스페인 태생 트라이아누스의 두 번째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제국 탄생 백년만에 로마의 最盛期를 이룬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이아누스(Marcus Ulpius Traianus)황제
트라이아누스황제의 기원 101년 Dacia(현 루마니아)원정기념 圓柱
(나선형으로 浮彫된 戰況 부도가 114장면으로 이루어지고 延長 2백미터가 넘는 이 원주는 1900년이 지난 지금도 원래의 자리에 서있다.)
기원 96년,잠자다 살해되고 원로원에 의해서는 記錄抹消刑(Damunatio Memoriare)에 처해진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이어 71세 고령의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지 1년 후 高地게르마니아사령관 트라이아누스는 네르바의 양자로 입양되어 호민관 특권과 군통수권을 황제로부터 할양받고 다음 해 집정관에 당선된다.
사실상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의 탄생이었다.
상식대로라면 트라이아누스는 겨울 휴전기간에 수도 로마에 와 98년 1월 1일 원로원 첫 회의에 참석해서 당선인사와함께 네르바 황제에 감사말을 할 것이었으나, 44세 무장은 로마에 오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1월 27일 네르바 황제의 訃音을 최전선 케른에서 받고도 전선에 머물렀다.
트라이아누스는 케른에 머문채 근위군단장과 그 동조자 몇 명을 전선사령부로 불러 도착즉시 그들 전원을 처형했다. 네르바 황제가 近衛軍團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첩보에 따른 조치였다.
40 중반의 성숙한 남자로서 제위에 오른 속주출신의 로마황제는 정식으로 황권을 수중이 넣기 전에 이미 자기가 해야 할일을 완벽하게 이해한 武骨로서, 더이상의 영토확장은 안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에 반하는 일이기에 더구나 다키아Dacia(지금의 루마
니아)침공은 기왕 결행한바에는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기원117년, 로마제국 전성기의 다키아屬州 (현 루마니아)
황제에 즉위하고도 1년 반동안이나 수도 로마에 오지 않고 라인강 도나우강 방위선 강화에 전념한 트라이아누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다키아 정벌계회을 세워 마침내101년 도나우강을 건너 적지에서 1 2차 전쟁을 완승으로 끝맺고 106년 여름 로마에 개선했다.
다키아왕국의 멸망은 다년간 위협을 가중시켜온 적의 소멸을 뜻했다.
도미티아누스시대에 맛본 굴욕적 講和도 이제는 과거사가 되고 수도 로마에서의 환희의 열광은 충천했다.
5만명의 포로와 전리품 데케발루스Decebalus왕의 막대한 財貨는 오랜만에 로마인에게 승전국의 쾌감을 만끽토록 했다.
트라이아누스는 다키아를 로마제국의 1개 속주로 편입시켰다.
현상 이상의 영토확창을 금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공세보다는 방위가 주목적이었던 帝政 이행 후 로마의 전략이었지만 새로 속주로 편입된 지역은 다키아뿐만 아니라 소아시아(현 터키)의 폰토스, 가라티아, 카파도키아, 고마게네, 팔레스티나의 유다, 북아프리카의 모리타니아 그리고 브리타니아(영국) 등이 추가되었다.
다키아 원정 당시 다뉴브강에 건설된 길이 1135미터,폭 12미터, 높이 27미터의 아치형 디리 교각에 새겨진 부조.
(다리는 파괴되어 없어졌으나 강기슭에는 교각이 지금도 남아있다.)
다키아王 데케발루스 Decebalus King of Dacia의 龍騎兵像( 기원87-106)
트라이아누스에 의한 다키아정복은 1,2차를 합해도 실제 전투기간은 2년뿐이었다.
사실, 다키아를 병합한 트라이아누스시대가 로마제국 영토가 최대 확창된 시대이다.
그런 연유로해서 공화정말에 로마의 영토를 대폭 늘린 율리우스 카에사르가 <갈리아戰記>를 쓴것처럼 트라이아누스도 <다키아전기>를 썼을것이다.
황제 취임당시는 첫 속주출신 황제라는 의식때문이었을까 모든일에 겸손하고 소박했던 트라이아누스였으나 다키아전쟁에 승리한 이후 처세가 바뀌었다.
기원107년 초에 거행된 개선식도 그 규모와 화려함에 있어 과거 어느 개선식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네 마리 백마가 끄는 전차에 타고 금실 수를 놓은 보라색 망토를 걸치고 초록색 월계관을 머리에 얹은 당당한 체구의 트라이아누스는 로마인의 눈에 제국의 운명을 맡겨도될 믿음직한 인물로 보였으리라.
그 앞을 행진하는 짐마차에 결박당한 다키아의 고관 포로들의 모습은 십년 전까지만해도 로마군 포로의 반환 댓가로 연 1인당 2아슈스의 배상금을 챙긴 장본인들이었다.
여러대에 나눠 실은 대량의 전리품인 다키아의 재화는 모두 공공사업에 쓰일 것이라고 트라이아누스는 선언했다.
승전 축하대회의 일환으로 콜로세움에서 건국 이래 최대대규모 열린 鬪技試合에는 1만명의 검투사가 동원되었으며 많은 수가 포로로 잡혀온 다키아 병사들이었다.
검투사훈련을 연마한 프로검투사와 대결해 목숨을 잃는 포로가 속출했고, 포로끼리 싸와야하는 고뇌를 맛보면서 죽은 자도 많았다.
콜로세움에서는 야수끼리 또는 야수와 인간과의 싸움도 선보였는데 다키아전승기념대회에는 합계 1만 1천마리의 야수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 장관은 123일 간이나 계속되었고 그동안 수도 로마를 전승기분으로 가득채왔다.
투기경기에서 죽은 다키아인 포로가 얼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포로의 총수라면 5만에 이르고 죽지않은 자는 노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트라이아누스는 다키아왕국을 단지 속주로 만든 것이외 도나우강 북안 일대에 위세를 떨치며 로마에 위협을 가해온 적을 일소하려는 것도, 그렇다고 굴복시키은 더더구나 아니며 지상으로부터 말살하려는 생각이었다.
전쟁 초기에 일찍 항복하고 공순을 서약한 다키아인은 다키아 거주를 인정했으나 싸와서 패한 다키아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2천미터 고봉 카르파티아 Carpathia山脈 북쪽으로 추방하고 고국 거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해서 다키아 땅은 무인지경이 되고 거기에 주변 여러 지역으로부터 인종 언어 풍습 문화가 다른 이민족을 이주시켜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형성되었다.
거기에 공통어로 로마인의 언어 라틴어가 침투 보급되고 후세에 이탈리아 프란스 스페인 포르투가르의 제언어가 라틴어를 모체로 발달했듯이 라틴계 제국과는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루마니아어는 란틴어에 속한다.
그래서 이탈이아어를 알면 루마니아어를 반은 알정도다.
1980년대말 공산주의가 문어질 당시 북한 김일성 닮은꼴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민중에 의해 처형된것으로 유명해진 지금의 루마니아는 고대에 다키아였기 때문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