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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ㅡ우리 모두 신경 거스르는 4 5 6월을 넘기면서 평상으로 돌아와 한참만에 로마사를 다시 씁니다.
오늘은 로마의 황제 하나가 이렇게도 태어난다는 그 실예를 5현제의 첫 황제 트라이아누스의 경우를
들어 소개합니다.ㅡㅡ
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4-
*賢帝 트라이아누스가 로마제국 最盛期를 열게되는 제국 최초 속주출신
황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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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ble bust of Trajan.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신상명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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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ign |
28 January 98 – 9 August 117 재위 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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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
name |
Marcus Ulpius Traianus (from birth to adoption); Caesar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from adoptiono accession); 전임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다 Imperator Caesar Nerva Traianus Divi Nerva fili Augustus (as emperor) |
| Born |
(53-09-18)18 September 53 |
| Birthplace |
Italica, Hispania 스페인남부 베티카屬州 |
| Died |
9 August 117(117-08-09) (향년 63) |
| Place of death |
Selinus, Cilicia 파르티아원정서 개선 도중 病死 |
| Buried |
Rome (ashes in foot of Trajan's Column, now lost) 로마의 트라이아누스 圓柱
밑에 골분 매장 |
| Predecessor |
Nerva 전임 황제 네르바 |
| Successor |
Hadrian 후임 황제 하드리아누스 |
| Wife |
Pompeia Plotina 妻 |
| Dynasty |
Nervan-Antonine 네르바-안토이니아朝 |
| Father |
Marcus Ulpius Traianus 父 |
| Mother |
Marcia 母 |
로마에 평화가 회복되고 베스파샤누스 황제의 Flavius朝가 기원69년 성립되어 96년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기까지 27년간 로마제국은 큰 外患 없이 평화가 유지되었다.
왕정시대부터 명문귀족이었던 율리우스 카에사르는 말 할것없고 카에사르의 養子가 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9代 베스파샤누스 황제 직전의 비텔리우스까지 8명의 황제 모두가 로마 출생이었다.
아홉번째 황제가 되어 두 아들에 제위를 세습한 베스파샤누스는 이탈리아 지방출생으로 황제에 오른 첫사례이다.
네르바가 10대 제위에 오르면서 황제 출생지가 로마로 회귀하는듯했으나 제위 1년으로 끝나고 트라이아누스가 등위함으로써 황제는 로마 출생이어야한다는 전통이 깨지고 황제 출신지는 로마의 통치 전역으로까지 범위가 넓혀진다.
네르바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이아누스(Marcus Ulpius Traianus)는 스페인 남부 베티카屬州 출생이다. 그가 로마의 5賢帝 역사를 쓴 첫황제가 된다.
외적도 저항 없이 투항하는 자는 물론, <영웅열전>을 남긴 고대사가 플루타르크가 일찌기 로마는 敗者同化로 강대국이 되었다고 언급했듯이 로마는 수 백년간 패자동화정책을 일관되게 이어갔다.
민족차별없는 패자동화정책은 유럽 전역에서 많은 인재가 로마에 들어왔고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는 천년제국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앞서 말한 5현제의 첫째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아버지代에 스페인속주서 로마로 이주해 로마군단 사령관을 지냈고 베스파샤누스 황제의 인정을 받아 동방의 최전방 속주 시리아 총독까지 역임했다.
28개 군단 중 일개 군단장의 아들 트라이아누스의 어렸을적 기록은 있을리 없어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알려진바 없으나 家父長制 로마시대 일반적 경향이 그랬듯이 아들은 아버지 군단소속의 로마군단병으로 젊음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전 4개 군단 중 제10군단장으로 예루살렘공방전에 참전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운 아버지 트라이아누스를 따라 전투에 참가한 당시 17세의 아들 트라이아누스는 불타오르는 유다의 본산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평화를 회복하고 로마에 개선한 아버지 트라이아누스가 황제에 의해 시리아속주 총독에 임명되어 안티오키아에 부임했을 때 아들 트라이아누스는 견습기간을 마치고 취임하는 군단의 大隊長으로 승진했다.
그것도 군단에서 한계단씩 밟아 올라가서 百人隊長이 되고 경력이 쌓여 겨우 손에 넣는 보통 대대장(Tribunus)이 아니라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Tribunus laticlavius)라 하는 10인 중 首席대대장으로서였다.
수석대대장에게는 원로원의원의 토가와 마찬가지로 주홍색 단을 댄 쇼올을 어깨에 걸칠 수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군단장 유고시 지휘권을 행사 할수있는 중책이 맡겨진다.
로마사가로 필명을 날린 타키투스나 2세프리니우스같은 당대 인물들도 수석대대장까지의 軍歷은 쌓았으나 둘 모두 거기서 그쳤다.
트라이아누스는 22세에 부군단장에 취임했고 그것도 제국의 안전보장상 가장 중요한 전선의 하나인 시리이가 그의 첫 임지였다.
시리아속주는 30개나되는 다른속주들과 달리 로마제국의 중요 방위선 라인강 및 도나우강과 더불어 유프라테스강을 사이에 假想敵 파르티아王國을 견제해야하는 동방의 최요새지였다.
당시 로마는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맺은 사이였으나 시리아속주에 3개 군단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거기에 파르티아 북방 흑해 연안국 아르메니아王國에도 2개군단을 상주시켰다.
방금 반란을 진압했을 뿐인 유다에도 1개 군단, 그리고 이집트에는 2개 군단을 주둔시켜 제국의 동방 안전보장을 담당하는 8개 군단의 주전력인 군단병력만도 4만 8천에 보조병력까지 합치면 10만을 육박하는 대전력이 된다. 시리아총독에 맡겨진 대임이다.
전통적으로 시리아총독은 로마의 동방군총사령관이었다.
그러한 아버지를 따라 시리아속주 주둔 로마군단의 수석대대장으로 있던 아들 트라이아누스가 왼쪽 어깨에 주홍색 쇼올을 걸치고 제국 서방의 최중요 전선 라인江 防衛軍團으로 아버지에 의해 전속된 것이 그의 나이 24세 때였다.
오리엔트와는 달리 겨울 추위와 눈비의 악천후 속 3년을 복무하는 동안 아버지의 전우였던 베스파샤누스 황제가 죽고 아들 티투스가 황제에 오르자 아버지 트라이아누스 총독은 4년간 격무 끝에 적과 마주 할필요 없는 小아시아속주 총독으로 전임했다.
기원81년, 28세의 트라이아누스는 로마인이 <명예로운 코스>라고 부르는 엘리트의 길을 걷는다. 국가예산의 출납을 총괄하는 임기 1년의 회계검사관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임기 1년을 마치고 라인강 방위군단에 복귀하여 여러 군단복무를 경험하고 기원83년 전후해서 원로원 위원이 도고 87년 34세에 <명예로운 코스의 제2단계인 법무관에 당선되었다.
수도 로마에서 재판장으로 사법담당 관직의 법무관 경력을 밟고나서 비로서 1개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 자격도 갖게된다. 전시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지만 평시에는 로마인이 지켜야하는 코스였다.
트라이아누스는 군단장으로서 첫 임지가 로마화의 역사가 오랜 스페인 주둔의 제7제미나군단이었다.
기원89년라인강 상류 방위담당 고지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이었던 사토르니누스의 반란이 발발하자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근위군단을 직접 인솔하고 북상, 동시에 트아이아누스의 제7군단이 피레네산맥을 넘어 출동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원정군의 도착 전에 라인강 하류의 저지게르마니아군단에 의해 즉각 진압되고 반란주동자 사토르니누스는 자살했다. 이 반란 진압출동을 계기로 제7군단장 트라이아누스는 두 살위의 옛벗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해후하게되고 최중요 전선의 하나인 공석중인 고지게르마니아군단 사령관에 임명된다.
정략단위 2개 군단 이상을 지휘할 수 있는 자격은 집정관 경역이 필수였으므로 트라이아누스는 기원 91년 선거에서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당선되고 1년 임기 후 92년에 39세로 고지게르마니아속주 총독을 겸하는 고지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기원92년부터 97년까지 5년간 트라이아누스는 황제의 절대 신임을 받았으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96년 가을 살해된 후에도 네르바 황제로부터도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트라이아누스가 전 후 황제들로부터 불변의 심임을 받은 이유는 그의 실적때문만은 아니었다. 인간은 <기록말소형>으로 단죄하더라도 그 사람의 업적이 훌륭하다면 계승하는 것이 로마인의 예외 없는 관행이었다.
황제 도미티어누스를 비난해온 로마史家 타키투스마저도 자기 공직상 출세는 도미티아누스시대에 성취되었다고 솔직이 고백하고 있다.
기원96년 9월 18일 45세의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궁정내 하수인에 의해 잠든채 살해되었다. 71세의 네르바가 황위를 이었으나 온후한 비정치적인 성격의 그가 황제 암살주모자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원97년 10월 27일 카피톨리노 언덕 위 유피테르神殿에 제사를 올린 황제 네르바는 오른손을 들어 퇴거하는 참레자들의 거름을 머추게하고 앞뒤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했다.
<고지게르마니아군사령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이아누스를 양자로 맞이한다.>
트라이아누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하는 선언이었다.
이로써 로마제국 최초의 속주출신 황제가 태어나게 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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