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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3-
*기원70년 플라비우스朝의 대두와 상식의 황제 베스파샤누스의 등장
*Colosseum
Interior of the Colosseum

The Colosseum or Coliseum, also known as the Flavian Amphitheatre (Latin: Amphitheatrum Flavium; Italian: Anfiteatro Flavio or Colosseo) is an elliptical amphitheatre in the centre of the city of Rome, Italy. Built of concrete and stone, it was.
| 기원 80년, 베스파샤누스와 티투스 父子황제가 로마 중심지에 완성한 로마원형극장.콘크리트와 돌로 지어진 플라비안 원형극장으로 알려진 (타원형 투기장)의 외부와 내부 모습, 5만 관중을 수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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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베스파샤누스(Flavius Vespasianus)가 시리아속주 총독을 지낸 무키아누스(Gaius L. Mucianus)장군의 적극적 협력과 도나우江 방위군단의 추대로 황제에 오른 뒤 맨먼저 착수한 일이 평화 제건사업이었다.
상식의 황제로 통하는 베스파샤누스는 누구보다도 帝國 백년만에 네로 이후 군웅할거한 로마의 내전을 중심에서 겪으며 제국의 존망을 걱정한 역전의 노장이었다.
유다의 반란을 평정한 아들 티투스의 승전보를 접하면서 이집트를 출발, 로마에 개선한 베스파샤누스가 실제로 로마제국 통치에 손을 댄것은 기원70년 11월이다.
제국 변경의 군단기지 생활밖에 모르는 직업군인이 광대한 제국 전역을 시계에 넣고 황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정치가로 변모하는 새로운 생애가 61세에 시작된 것이다.
그는 먼저 分身役의 무키아누스의 손을 빌려 원로원에서 황제법을 제정 통과시켰디.
황제의 세습을 인정하는 황제법 입법취지로 <皇位 계승문제는 내 자식들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無政府 상태로 역행하느냐 양자택일의 문제일뿐이다.>고 주장했다.
불과 1년 사이 네 황제의 등장과 퇴장을 경험하고 그때마다 사후승인밖에 할 수없었던 무력감에 빠진 원로원 의원들이 정국 안정으로 이어지는 황위의 세습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지금도 로마의 카피톨리노미술관에 <베스파샤누스皇帝法(Lex de imperio Vespasiani)>이 검정색 대리석 비문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帝政 백년 역사에 통치자가 일시에 네 명이 들고나며 제국 존망을 위태롭게한 內戰과 갈리아(현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지역)와 유다(현 이스라엘)의 반란을 일거에 수습한 로마의 전통적 전략은 무엇이었는지를 후세 사가들은 추적했다.
앞서 언급한 베스파샤누스의 분신역할을 한 무키아누스 장군의 전략은 사태 수습에 우선순위를 두지않고 모든 것을 동시에 해결하는 전법을 택했다.
첫째는 英斷이라고해도 좋을만큼, 제국의 西方에 주둔하는 전군단을 총결집한다는 생각으로 소집한 9개 군단을 갈리아帝國의 창설 기치를 내건 게르만系 갈리아人의 반란 진압에 투입한 것이다.
이 영단으로 갈리아독립 반란은 3개월만에 진압되고 동원된 군단병력은 라인강 방위선에 원상복귀하여 방위선 붕괴위기를 예방 할 수있었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반란은 라인강 東西岸 게르만지역(현 네덜란드와 독일 전역)으로 비화되어 로마제국과 게르만족 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기원69년부터 70년에 걸친 갈리아 상황으로보면 주전력인 군단병만으로 굳혀진 9개 군단 5만 4천까지 투입할 필요는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략가 무키아누스는 대군을 투입해서 일거에 해결해가는 전법을 취했다.
전투상황이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피아 모두 상대에 대한 증오감이 증폭되고 반대로 단기간에 끝나면 그만큼 증오감도 희석된다.
뿐만 아니라 전후처리나 대책도 감정때문에 지장받지않고 이성적으로 수행이 가능해진다. 어떤 전쟁도 深謀遠慮하는 정신적 기반에서 출발하는 로마인 전래의 전략구상의 한 단면을 여기서도 본다.
북핵위기를 언제까지 겪을지 모를 지금의 한반도 정세에 비추어 우리가 看過 할 수없는 고대로마인의 정략구상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대 한 탁월한 전략가에 의한 차질없는 전략전술이 로마를 위기에서 구하고 황제로 하여금 제국의 재건을 순조롭게 한 역사적 배경을 다음에서 엿볼 수있다.
즉, 로마의 많은 武將들은 군인으로서 우쭐대거나 허영심같은 것을 그들에게서 볼 수없다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특색이다.
그들은 다수의 병력으로 소수의 적을 공격하는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5백명이 지키는 유다의 마사다要塞를 공략하는데 10배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해서 이를 경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로마의 군인정신을 몰라서하는 소리다.
로마군의 전법은 율리우스 카에사르기 남긴 <갈리아戰記>에서 보듯이 병력이나 무기 그밖에 보급과 같은 確定要素를 갖추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 연후, 아군은 개별 병사들의 士氣면에서도 우세했다고 말한다.
무슨뜻인가하면 정신력과 같은 비확정요소는 맨 뒤에 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속설까지 전해져 오는 터다.
전투는 속전속결과 최소한의 희생 그리고 敗者 同化, 이 3대원칙을 전쟁 수행의 기본개념으로한것이 카에사르 이후 로마인의 전통적 전략이었던 것이다.
플라비우스朝 초대 황제가 된 베스파샤누스는 즉위 즉시 열려있던 야누스神殿 문을 닫으며 원로원에 선포했다.
<황제는 이후 마땅치 않다고 해서 원로원 의원을 국가반역죄로 몰아 처형하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며, 원로원은 황제의 정무 수행에 이의를 걸어 황제를 탄핵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제국 백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 재건에 앞장선 베스파샤누스 황제는 위 사진이 보여주는 로마 不朽의 건축물 원형극장 콜로세움 건설에 착수했다.
누구에게나 황제와의 면담을 개방한 상식의 황제 베스파샤누스는 변설을 즐기는 철학자 한 무리와의 대화 중 共和政 복귀를 주장하는 말에 참다못해 던진 말<....왕왕 짖는다고 나는 그 개를 죽이지 않는다>는 경구는 후에 冷笑主義 犬儒학파(cynlcs)의 유래가 되었다는 일화로 전한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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