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2-
*살아난 요세푸스Josphus의 예언이 적중, 2년 후 베스파시아누스가 登極하다
Roman milestone mentioning the destruction of highways during the revolt. 기원70년 유다반란 진압전 중에 로마街道가 파괴된 사실을 里程標가 말해준다.
숨어든 동굴에서 살아나와 로마군에 투항한 요세푸스(30)는 로마군 진지로 연행되어 부사령관 티투스(28)에 인계되었다.
인종편견이 없는 티투스는 47일간이나 로마군의 발을 묶어놓았던 유다군 지휘관이 동년배의 젊은이라는데에 매려되어 요세푸스를 잘 보호하라고 부하들에 명했다.
그러나 부친 베스파시아누스(이하 베스파)는 사령관의 직분을 잃지않고 아들 티투스에게 요세푸스를 로마로 압송해야할 포로이므로 잘 감시하라고 일렀다.
낌새를 챈 요세푸스는 생애 최대의 도박을 건다.
요세푸스는 로마군 사령관과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베스파는 이에 응했다.단 아들 티투스와 사령관의 동료 둘이 동석한 가운데 요세푸스를 불러들였다.호신상 그랬겠으나 요세푸스는 적장에 추호의 위해도 생각치 않았다.
요세푸스는 입을 열었다.
<귀하께서는 요세푸스라는 유다인 하나를 포로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神은 나로하여금 한가지 傳言하도록 귀하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었다.
<네로 후를 잇는 것은 귀하와 귀하의 후손이며 이 예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나를 귀하의 곁에 두어야한다>고.....
베스파는 믿지 않았다.
더구나 네로 황제의 지위는 67년 여름 당시 확고했고 낮은 출신의 베스파는 감히 황제 지위를 넘볼 처지가 아니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동료 지휘관이 요세푸스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요타파타의 주민들에 함락과 너 자신도 포로가될 운명을 예언하지 않았는가>고....
요세푸스는 예언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을뿐이라고 대답했다.
<유다戰記>에서 요세푸스의 자기변명 냄새가 풍기지만 베스파는 자기 예언을 믿는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유다인만큼은 아니지만 로마인도 미신이 깊었던 것은 사실이다.
전선에서 전투개시전에 새점(鳥占)을 치는 경향이 많았기때문이다.
어떤 사령관은 새점 치기 전날 밤 닭에 모이를 주지않고 아침에 배고파 모이를 쪼는 닭의 모습을 보고 전투의 吉凶을 점치기도 했다.
로마史家 타키투스Takitus가 말했듯이 <예언>을 요세푸스가 말하는 것처럼 신의 계시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요세푸스의 생애 최후의 도박으로 보느냐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일 수있다.
아무튼 요세푸스처럼 생사 기로에서 한번 시도해 볼만한 도박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역대황제 중 가장 겸손과 상식의 황제로 통하는 베스파는 66년부터 70년 9월 에루살레 함락까지 유다반란 진압에 충실했고, 네 황제가 죽고 죽이는 로마의 대혼돈을 변방의 방위전선에서 지켜보면서 예언자 요세푸스를 아들 티투스의 보자역으로 착실히 활용했
다.
그러는 중 네로 이후 세 황제가 등극 등락을 거듭하는 현실을 보면서 네로 이후 로마는 귀하의 것이 될 것이라고한 예언이 세 번이나 빗나갔지만 忘言이 아니냐고 요세푸스를 추궁한 적이 없었다.
내심 젊은 유다인의 예언을 믿어서인가 아니면 요세푸스의 출신계급과 지능을 유다반란 진압에 이용할 수있겠다고 보아선가 베스파의 균형잡힌 정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요세푸스가 예언한지 2년이 지나는 79년 7월 로마 황제가 오토에서 비텔리우스로 바귀었다는 것이 전해진 동방의 제군단은 비텔리우스를 배척하고 베스파를 황제에 옹립한 것이다.
황제에 이름을 올린 베스파는 비로서 3년 전 요세푸스의 예언을 믿었다.
요세푸스는 군단에서 석방되고 이전처럼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군 진지를 떠나지 않고 예루살렘 함락시까지 동포들에 항북을 권고하는 로마군심리전에 협력했다.
이듬해 71년 티투스가 로마에 개선할때도 함께 딸았고 황위가 확실해진 단게에서 베스파 황제는 요세푸스에게 자기 家門名 플라비우스Flavius를 하사했다.
요세푸스 플라피우스의 새 이름을 가진 그는 로마에 와서 후반생을 집필 생활로 보내며 그가 아니면 유다의 역사에 남지 않았을지 모를 <유다전기>를 남겼다.
정통을 신봉하는 유다교도는 그의 저작 <유다전기> 없이는 유다의 반로마 봉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읽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을 쓴 인간 요세푸스를 용서하지 않는다.
<背信者>가 오늘까지 요세푸스에 붙어다니는 유다인이 내린 딱지이다.
요세푸스의 선택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리고 이집트 장관을 지낸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 또 테베리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은 유다 철학자 필론처럼 로마세게 내에서 유다교도의 존속 가능성을 믿은 유다인은 존재했다.
즉, 로마인의 철학이라해도 좋을 <普遍>과 유다인의 종교가 품은 <特殊>가 공존공영 할 수있다고 생각한 유다인은 역시 있었던 것이다.
카에사르의 표현대로<보고싶은 면만 보고 보고싶지 않은 현실에 눈감는다>면 유다인들 자신에게도 불행한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 다른 생활양식, 다른 인종이더라도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玉碎는 후세를 감동시킬지는 모르나 따지자면 自己陶醉에 지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거기에 취할 수가 없었던 유다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계 속--
소음이 심해서 환풍기를 장식품으로 쓰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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