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1-
*기원70년 8월 10일,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6년 끈 반란 진압전도 일단락되다.
Siege and Destruction of Jerusalem by the Romans (1850 painting by David Roberts)
기원70년 8월 10일, 5개월의 격전 끝에 로마군의 포위공격에 의해 大神殿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에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전회에 언급한 요타파타시 공방전에서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가운데서도 감투한 유다군 청년 지휘관 요세푸스Josephus는 도망쳐 한 동굴에 숨어 목숨을 구했다.
요세푸스가 도망쳐 숨어든 동굴에는 요타파타시의 유다교 장로 40명이 먼저 피신해 있었다. 투항자는 살려주는 로마군의 포로 처리방법을 잘 아는 요세푸스는 장로들에게 나가서 로마군에 투항하자고 설득했다. 그도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장로들은 전원 자결하는 것으로 유다교도로서의 긍지를 지키겠다고 요세푸스의 투항 설득을 거절했다.
<唯一神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 신을 받든 정체의 국가수립에 우리의 자유를 바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할 일이다. 고로, 그런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죽음 이외 달리 길이없다.> 유다교도로서의 자결은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가 얻어지지 않을 경우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숨어있던 동굴이 로마군에 발각되었다.
투항하라는 권고를 받은 장로들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결국, 제비뽑기로 집단자살을 하기로 결정했다.
맨 먼저 뽑힌 자를 다음 자가 죽이고, 또 그다음 사람이 앞사람을 죽이고 이렇게 차례로 죽이고 죽으면서 맨 뒤에 남은 사람이 자결을 하게된다.
그런데 40명이 차례로 죽고 두명만이 남았는데 그 중 하나가 요세푸스였다.이것은 현대 數學者에 의하면 고등수학 지식을 구사하면 둘 중 한 사람으로 남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무튼 요세푸스 자신은 그의 저서 <유다戰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명의 신의 장난이라고 할까 아니면 신의 뜻이라고 할까, 요세푸스와 다른 한 사나이만이 남았다. 그는 한번 더 제비뽑기한 결과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싫어했던 까닭에 그 한 사람에 대해 자신을 믿고 함께 살아가자고 설득했던 것이다.>
설득은 성공하고 두 손을 들고 동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로마군 진지로 연행되었다
.
연행된 요세푸스의 젊음에 티투스(베스파시아누스의 장남, 유다전선 부사령관)는 충격을 받았다. (거짓말처럼 이어지는 요세푸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인연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회에 서술하기로 한다)
기원 67년 5월에 시작된 유다반란 진압은 요세푸스가 지키고 있던 갈리리지방을 제압한 후로는 유다의 중앙부로 전선을 이동시킨채 유다의 온건파가 우세해져서 평화적 해결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유다측에 시간 여유를 주고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의 자결 후 政變이 거듭되고 있어 유다전쟁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옹립된 단계에서 예루살렘공략전은 베스파시아누스 皇帝位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동방 거주 유다인사회에 대한 영향에서도 유다전쟁은 절대로 속히 성공해야 하므로 즉시 재개했다.
예루살렘공략전 총지휘를 티투스가 맡고 5개 군단이 투입되었다.
기대와 달리 급진파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한편 예루살렘 시내는 항전 일색, 공격하는 로마측은 조기 해결을 모색하는 마당에 이미 전단은 불을 뿜을 수밖에 없었다.
예루살렘은 사면이 높은 절벽위에 서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여기를 공략하는데는 깊은 계곡의 장애가 없는 북쪽으로부터 공격할 수밖에 없다.
로마군은 관례에 따라 전투개시 전에 항복을 권고한다.
아리에스 즉, <숫양(雄羊)이 성벽에 격돌하기 전>이다.
아리에스는 성벽을 뚫는데 사용하는 성벽 파괴용 <破城槌>로서 이 무기가 성벽을 가격하기 전에 투항하면 살려주고 이후는 죽여도 좋다는 것이 로마군의 전쟁규칙이었다.
투항 궈고를 듣고 항복하려던 유다인은 시내의 급진파에 의해 모두 참살되었다.
로마인으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데는 일치하던 유다인이 동포 살육자로 변해 마사다요새에서의 집단자살로까지 이른 이유가 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순수를 생애 지고의 가치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불순만큼 타기해야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5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70년 8월 10일, 예루살렘大神殿은 불타오르고 9월 8일 시내에서의 항전도 수그러들고 9월 26일 저항은 모두 끝났다.
희생자 수가 문제이나 로마史家 타키투스Takitus는 사망자와 포로 합해 60만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포로의 수는 유다전쟁 전기간에 9만 7천, 예루살렘공방전에서 사망 백 10만에 이른다고 했다.
요세푸스의 추정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다인의 명절 유월절(踰越節)을 기해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을 합해 2백 7십만이 살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대신전이 불에 파괴돼 버린 것은 이후 유다교도에는 유다교의 總本山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상징적 표시였다.
어디 살든 유다인 성년남자는 매년 2도라쿠마의 상납금을 바치는 제도는 폐지시키지 않았으나 상납처를 이후는 예루살렘의 대신전이 아닌 로마의 유피테르신전으로 바뀌었다.
돈의 흐름을 끊어 유다교의 위세를 꺾고, 한편 제국 전체의 방위를 담당하는 군무를 면제 받는 유다인이기에 다들 내는 屬州稅 대신 유다人稅를 내라는 것이 진의였다.
예루살렘에만 존재했던 大祭司長 제도도 폐지했다.
70명의 제사장으로 구성된 예루살렘의 自治機構이던 <70인會議>도 폐지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유다의 특성을 인정해서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이후 로마는 1개 군단 병력과 부속 보조병력으로 된 1만의 병력을 상주시키기로 했다.
예루살렘 함락 후에도 15킬로 남족의 헤로디온과 사해 동쪽 마카이로스 사해 서쪽에 솟아있는 마사다 3개 시가 여던히 유다인 손에 들어 있었다. 모두 예루살렘 낙성시에 도망친 급진파의 잔당들이었다.
앞의 두 城塞는 곧 함락되었으나 마사다Msada 공략은 3년이나 걸렸다.저항도 완강했으나 서두를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며,로마로서의 <유다전쟁>은 예류살렘의 함락으로 사실상 종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항하지 않는 유다인의 존속은 인정하지만 반항하는 유다인이 기다리는 운명은 죽음 아니면 노예라는 것을 명확히한 기원70년의 <유다전쟁>으로 유다인의 반로마운동은 이로부터 반세기 동안 잠잠해진다.
그것이 재연된 것은 트라이아누스帝의 등을 찌른데서 발단된 로마의 분노로 기원116년파르티아(페르시아)遠征시였다.
다시 불붙은 반로마운동은 그때마다 제압되면서 하드리아누스帝의 시대까지 게속된다.
기원130년 유다대책을 위해 팔레스타인를 방문한 하드리아누스제는 유다 전토를 군사적으로 제압했을 뿐만 아니라 초강경책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다인을 모조리 추방하고 이후 유다교도의 예루살렘 거주를 완전히 금했다.
조국을 잃은 유다족이 각지로 흐터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 流浪時代가 이때 시작된 것이다.
로마의 다섯 賢帝 중 하나로 꼽히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강경책이 주효해서인지,이후 유다인의 반항은 전혀 그림자를 감추게 된다.
--계 속--
다음회는 9대 황제로 登位하는 베스파시아누스와 요세푸스의 奇緣에 얽힌 이야기를 엮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