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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60-
유다의 반란을 진압한 티투스(Titus)의 개선문에 색여진 부조. 예루살렘神殿에서 가져온 유다교의 神器 촛대와 그밖의 전리품을 메고 개선행진하고있다.
*多神敎의 로마와 唯一神敎 유다간의 지루한 普遍과 特殊의 갈등
普遍을 사회적 가치로 보는 다신교의 로마인과 特殊를 고집하는 일신교 유다인간의 융화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카에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제압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진주하여 그리스계와 유다계 두 민족간의 사회적 차별을 평등관계로 조정해 줌으로써 유다인들은 환영했으나 기득권을 침해받았다는 다수족 그리스계의 반발을 사 이집트전쟁까지 치른 지난 역사가 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고도 각 屬州民들의 고유 신앙이나 풍습을 억압한 적은 없듯이 유다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원66년 여름에 발발해서 73년 봄 마사다Masada의 玉碎로 종결된 유다전쟁은 독립투쟁 차원에서 보면 전회에 서술한 바타비아族의 반란으로 시작된 갈리아帝國 건설사건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두 사건의 성격은 전혀 달랐다.
유다인이 거주하는 팔레스티나 일대가 시리아와 이집트 두 강대국 틈에 끼어 지정학적으로 시달려오면서 일신교 신앙의 선민사상이 한
특수를 지향하는 유다민족의 배타성에서 비롯된 사건과 카에사르 이후 백 여년 로마화에 순응해온 갈리아 부족의 반로마 사건은 동기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다신교 신앙과 유일신교 신앙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다신교의 신은 인간을 지켜주는 행위를 돕는 존재인데 반해 유일신교의 신은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거기서 유다인에게는 神權政治Theocracy, 라틴어의TEOCRAZIA가 아니면 안된다.
종교 우선의 모세 율법 존중을 주장하는 팔리새派(Pharisees)와 정치 중시의 사도카이派(Sadducees)가 갈렸지만 동족간 충돌은 하지 않았다.
로마 거주 유다인에게도 빈민구호양곡이 매월 배급되었으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유다인들은 혹시 배급날이 토요일과 겹치는 경우 배급 타가는 것마저 거부했다.
이처럼 특수를 철저히 지향하는 유다인들에 대한 로마인은 칼리굴라帝 말기 일시를 제하고는 직접 지배 하에 들어온 기원6년부터 60년간 소수민족의 신앙 존중과 전통 풍습의 보존 정책에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예루살렘에 신권정체를 수립하는 것만은 절대 용납치 않았다.
한편 신권정체만이 정통이라고 믿는 것이 유다교도의 비원이었기 때문에 로마가 어떤 간섭을 하드라도 신권정체 수립의 자유만은 양보할 수없었다. 그 비원이 폭발한 것이 기원 66년에 터진 유다의 반란이다.
로마의 유다속주 장관 플로루스가 屬州稅 체납분으로 예루살렘神殿 보물고로부터 17다렌토의 金貨를 몰수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60년간 묻어뒀던 불씨가 살아나게된다. 당시 17타렌토의 돈은 서민생활 수준에서 보면 560명의 1연수입에 해당한다.
금액의 다과가 문제가 아니라 유다가 신성시하는 예루살렘신전을 모독한데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다.
반로마폭동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세를 일소하는 전투로 격화해 왕궁으로 피신한 로마수비대가 항복을 했으나 전원 학살 당하는 참사를 빚고, 유다 전역으로 확대되어 양측 보병 5천 3백과 기병 4백 80명의 전사자를 내고 시리아와 이집트에까지 번져 그리스계와 유다계의 살생극으로 비화했다.
유다의 성역 예루살렘에는 폼페이우스 이래 로마 정규군단을 주둔시키지 않는 전통에 따라 당시도 소수 수비대만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네로 황제가 건재하던 이듬해 67년 봄 반란 진압군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장군 인솔하의 3개 군단이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라는 유다 청년이 맞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유다 북부 갈릴리Galillee를 향해 진군했다.
유다출신 병사를 비롯해서 나바티아와 아라비아 병사를 포함해서 공격하는 측의 로마군 총병력은 6만에 달하는 인종 피부색 각각의 국제연합군이었으나 신권정체 수립이라는 유다의 대의가 타민족에서까지 공명을 받지못한 유다군은 단일민족군으로 싸와야했다. 지금의 남북 대결상황과 비교한다면 무리일까?
이 로마인 대 유다인의 싸움은 고대사회의 <보편>과 <특수>의 대결이기도 했다.
속주병을 포함했다고는하지만 조직의 로마군단에 청년 요세푸스가 지휘하는 유다군은 상대가 아니었다.
임기응변의 전술전략에 약한 베스파시어누스는 대병력을 가지고도 45일간이나 적의 기책에 농락당한 끝에 유다측 전사자 4만, 포로 천 2백, 수 만의 자살자를 내고 마침내 67년 7월 25일 사수하려던 요타파타시 함락에 성공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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