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57-
*백년의 율리우스(Jullius)朝가 막을 내리고 플라비우스(Flavius)朝가 도래하다

Actium sea battle by Lorenzo Castro, painted 1672, National Maritime Museum, London
런던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로렌조 카스트로 작, BC.31년 그리스 서해안의 악티움海戰
기원68년 무자식 네로의 자살로 카에사르에서 시작되는 율리우스 크라디우스朝, 제국 걸설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은 5대황제로 끝났다.
BC.31년 그리스 西岸의 악티움海戰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이듬해 30년 8월 로마에 개선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1인자가 되면서 사실상
帝國의 元年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세기에 걸쳐 로마제국은 Pax-Romana를 실현했다.
국가 통치자는 권위와 권력과 그리고 정당성 3위1체의 자격이 갖춰져야 한다.
로마제국 초기 황제들의 첫째 덕목은 Augustus, 즉 Authority 權威에서 출발한다고
지적 한 바있다.
5대 황제 네로 사후, 원로원과 시민의 제1인자(Princeps)가 되고 군단병의 충성 서약을 받아 명실상부 즉위하여 황제가 되려던 갈바(Servius Galba),오토(Marcus Otho),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 Germanicus) 3인의 치세는 모두 三日天下로 끝났다.
기원68년 6월에서 69년12월, 1년 반만에 셋이 적수에 살해되거나 자살로 황제의 꿈을 거두었다. 직전의 네로까지 치면 2년도 안된 사이에 제위를 탐하여 4인의 황제들이 죽어간 것이다.
이후 등장한 인물이 제국의 제2안정기 토대를 닦은 플라비우스朝의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장군이다.
동서고금 독재체제의 국가가 군사력을 유지하는 첫째 이유는 국내 반대세력을 제압하는데 있는 것이지 국외의 적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 전형이 북한이라는데에 이의를 달 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로마제국은 본토 이탈리아에 1개 군단도 상주시키지 않았다.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은 모두 제국의 국경이라기보다 방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에 상주하는 군사력은 수도 로마와 본국의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편성된 近衛軍團 1만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 공백기에 帝位를 노린 황제 후보들은 로마에서는 먼 변방 속주
특히 방위 위험이 높은 지역에 주둔하는 전략군단(2개 군단 이상)사령관들에서 나왔다.
앞서 밝힌 삼일천하를 이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모두 전선사령관 출신이고 베스파시아누스도 마찬가지이다.
기원70년 황제에 등극한 베스파시아누스는 反로마봉기로 팍스-로마나가 위태로와진 팔레스타인지역의 유다에 全權을 위임받고 네로황제에 의해 파견된 동방군사령관이었다.
60 고령의 역전의 노병이지만 일개 군단병에서 전공을 세우며 단계를 밟아 승진한 명장으로 그의 부친은 신분조차 알려지지 않은 지방의 평민출신이다.
그로서는 1년 전까지 자신이 황제를 넘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사실, 유다전쟁에서 포로가 된 유다학자 요셉 프라비우스가 당신은 황제가 된다고 예언을 하자 이를 일소에 부쳤고, 갈바의 登位 때는 아들 티투스를 지지축의 사절로 로마에 보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갈바가 살해되고 황제가 오토로 바뀌자 사절까지는 보내지 않았으나 지지 의사를 전해 오토는 베스파시아누스 휘하 3개 군단도 자기편으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잠시 후 오토가 자살하고 비텔리우스가 등위하자 이때는 침묵하고 자신의 황위 실현에 로마의 동방군 전체의 의향 타진에 힘섰다.
7개 군단의 도나우강 방위군과 시리아 주둔 4개 군단 그리고 유다의 반란진압을 맡은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의 3개 군단, 이집트 주둔 2개 군단, 모두 16개군단의 군사력을
통합군으로 편성하면 라인강 방위군단을 앞세운 티벨리우스 세에 승산이 있었다.
도나우강 방위군단으로부터 황제 추대 제의를 받은 것은 시리아 주둔 4개 군단을 거느린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였다.
기원69년 4월15일 北伊 베도리아쿰戰鬪에 패한 오토가 자결을 하고, 비텔리우스가 원로원에 의해 황위에 오르자 비텔리우스에 원한을 품은 도나우강 방위군측이 무키아누스에 황제 추대 제의를 했다.
그러나 제의를 받은 무키아누스 총독은 연장자 베스파시아누스를 염두에 두고 동년 6월 이집트 속주장관 알렉산드로스와 베스파시아누스 그리고 자신의 3자화담을 베이루트에서 갖고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한다.
기원69년 10월 24일 벌어진 제2차 베도리아쿰전투는 공수 쌍방이 1차전 때 병사 그대로였다.
불과 몇개월 전 클레모나의 원형경기장 건설현장에서 비텔리우스측에 혹사당하고 주민들로부터는 모욕을 받은데 대한 한풀이로 도나우강 군단병들에 의해 크레모나시가는 철저히 파괴되고 반항한 자도 안한 자도 무차별 학살 당하는 처참한 광경이 6일간 벌어졌다.
비전투원인 클레모나 시민을 포함해 쌍방의 사망자 수가 실로 4만 2천에 달했다.
국가대 국가간의 전쟁보다 동족간의 내전이 더욱 잔혹하다는 것을 증명한 전투였다.
베도리아쿰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로마의 황궁에 앉아서 들은 비텔리우스 황제는무슨 생각인지 황궁을 나와 잠시 배회하다가 다들 도망가고 텅빈 황궁으로 되돌아와 황제 방이 아닌 빈 쉬위실로 들어가 숨었다.
거기서 도나우강 군단병들에 의해 두 손이 뒤로 결박된채 돼지처럼 끌려나와 로마광장에 세워져 간단히 처형되어 시체는 눈 앞의 테베레江에 던져젔다.
제위 8개월, 54세의 죽음이었다.
이렇게해서 로마는 불과 1년 반사이 황제 네명의 줄죽음을 겪고 새 황제를 맞아 제2안정기를 모색하게 된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