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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서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56-
(로마史家 타키투스에 따르면 네로가 예수교인들을 로마大火(기원64년)의 범인으로 지목,갖은 방법으로 학살했다.
그림은 학살 마지막 방법의 火刑 장면)
로마황제의 까다롭고 복잡하고 독특한 權力構造
엄격히 말해 로마의 皇帝(Imperator)는 군 최고사령관이란 의미밖에 없다.
장병들이 충성을 서약하는 상대이지 일반 로마시민은 충성 서약의 의무가 없다.
원로원 의원이더라도 군사령관이나 군단장, 속주총독으로 軍務 겸직 의원만은 충성을
서약한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일뿐 다른 공직을 겸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황제가 아니라 단지
시민 중 <제1인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당연히 충성 의무가 없다.
원로원 및 로마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 S.P.Q.R>이 국가로마의 2대 主權者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황제라 불러도 전혀 손색없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는가?
제1인자 Princeps는 다음의 제권력도 함께 가지기 때문이다.
1. <最高司令官>, 군단병 보조병을 합해 30만의 군사력을 명령일하 움직일 수있다.
2. <護民官特權>,공화정 시대에 평민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된 호민관직의 계승으로 법안이 원로원에서 부결되더라도 호민관이 소집하는 평민회에서 가결되면 정책화가 가능하다. 따라서 원로원 결정 사항도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로 무효화시킬 수있다.
오늘날 유엔 안보리의 미영불러중 상임이사국의 거부권(VETO)과 같은 강권이다.
3. <最高神祗官>, 로마종교계의 최고위자로 국정 축제일에는 선두에 서서 제례를 집전한다.
4. <國父>, 시민의 뜻을 받아들여 원로원이 의결하여 수여하는 존칭으로 율리우스 카에사르와 아우구스투스도 받은 이 존칭에는 원로원계급과 일반평민 로마사회 각계층의 이해를 초월한 국민 전체의 아버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티베리우스帝가 이 존칭 수락을 거부한 것은 정치적 오류였다.
철부지 3대의 칼리굴라를 빼고 초대 아우구스투스, 2대 티베리우스, 4대 크라디우스
선제들은 공화정 이래 왕정 기피사상이 배어있는 로마인들의 정서에 영합하는 로마황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철부지 5대 네로가 전제군주로 행세함으로써 율리우스 크라디우스家의 皇統은 맥이 끊긴다.
歌手가 되고픈 철없는 皇帝 네로
기원64년, 로마에서 네로황제는 아르메니아왕 대관식을 주재하고 사실상 숙원의 파르티아문제 해결을 봄으로써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가 높아지자 한층 더 필요한 자제력을 잃었다.
네로는 소년시절부터 自作詩에 곡을 붙여 체트라라는 수금 하프를 타며 노래부르기를 즐겼다.
황제가 된 후에도 황실 시종들을 모아놓고 하프 반주에 자작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박수 받는 즐거움으로 자기만족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스문화에 심취한 타고난 겁쟁이 네로는 27세 나이의 황제가 되고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로마정신의 발상지이기도한 로마에서 實演할 용기가 없어 그리스문화풍이 짙은 나폴리의 야외극장에서 가수데뷔 연주를 하고 가수황제가 된다.
구경꺼리 난 나폴리 야외극장은 몰려든 인파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황제가 노레를 부르니 박수와 환성이 터져나오고 극장은 황제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네로는 흥분하여 가수데뷔에 성공했다며 자기만족에 취해 다음번에는 본고장 그리스
순회공연까지 다짐했다.
로마大火와 잿더미 위에 세워질 黃金宮殿의 꿈
나폴리 연주를 마친 얼마 후 로마에 뜻밖의 대참사가 벌어졌다.
기원64년 7월 18일 로마대경기장 관람석 아래 구경꾼들로 복새통을 이룬 한 가게에서 일어난 불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파라티노와 체리오언덕의 주택들을 덮쳐 잿더미로 만든것이다.
9일간 연소된 이 불로 로마중심가가 모두 타고 수 십만 이재민을 냈다.
백만 시민의 사는 로마시 14개 행정구 중 4개 행정구만이 무사했고 3개 행정구가 전소, 7개 행정구가 반소했다. 그러나 로마사가들은 인명 피해 기록은 개략도 남기지 않아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로마의 여름은 이따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서 불어오는 시로코(sirocco)라 불리는 뜨거운 남서풍이 맹위를 떨친다.
황제 네로가 해야 할일은 그리스연주여행이 아니라 이재민 구호와 로마 재건사업이었다.
주거용 건물 높이를 17m까지로 제한하고 건물 간격은 최소 70cm를 엄수하도록 규정했다. 벽은 석재, 대들보도 목재 대신 석재를 써야하고 다세대주택에도 內庭을 반드시 만들도록 하며 종래의 공동벽을 금지하고 건축재도 내화재를 쓰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예나 지금이나 건설이라는 것은 사나이의 꿈이다.
특히 전제군주나 독재자들은 무엇이든 축조해 후세에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네로도 그랬다.
그리스人이 아르카디아Arcadia라 부르는 綠色理想鄕을 로마 도심부에 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 종심부 파라티노에서 에스퀴리노에 이르는 15만평 대지에 列柱廻廊 형식의 통로를 만들어 중앙에 4m 높이의 네로黃金像을 세우고 아래 저지대는 광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지는 大役事였다.
세 줄로 늘어서는 열주회랑의 길이가 무려 1.5킬로, 본관은 광대하고도 기발해서 살롱의 천장은 회전식으로 덮고 사람들의 머리위에는 현란한 꽃닢이 휘날리게 하는 등 도무지 화려하고 꿈만같은 Domus Aurea라는 黃金宮殿이었던 것이다.
도무스 즉,私邸를 의미하는 말을 쓴것부터가 네로의 잘못이었다.
로마인들은 시내에 일상 주택을 갖고 세컨드 하우스라해서 시골에 별장을 두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내에 녹색정원같은 것 가질래야 가질 수없는 로마시민 앞에서 네로의 사저로 알려진황금궁전을 두고 이제야 사람다운 삶을 살게될 것같다는 따위의 기고만장한 소리를 했으니 민심의 이반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황금궁전은 네로의 죽음으로 완성을 보지못하고 후속 황제들에 의해 콜로세움 공중목욕탕 등 다른 건조물들로 대체 건립된다.
네로의 예수교인 학살과 民心離反 그리고 自殺

네로황제의 섭정 세네카Seneca의 죽음(기원64년)
세네카는 반역죄목으로 네로의 자살명령을 받고 즉음을 맞았다.
왜 네로는 방화범으로 유다교도들은 제쳐두고 예수교인들만을 표적 삼았나?
유다교인들은 아우구투스 황제에 의해 테베레강 서안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도록 허락받고 살아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기원33년이다.
유다인사회는 로마제국의 주요도시 어디에나 존재했기때문에 로마에도 예수교 포교의 손은 뻗혀 있었다.
로마인은 다신교 민족이기때문에 종교면에서는 실로 관대했으므로 유다교의 한 분파로밖에 보지않았던 예수교에 대해서도 사회불안 원인이 되지 않는 한 허용하는 방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관용이란 상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존재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유다인은 자기들만이 신의 선택 받은 選民思想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민족에 대해 적극적 포교를 하지 않는다.
반대로 예수교인은 신(하나님) 앞에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평등사상은 <예수교의 신 앞에서>라는 전제조건이 있는 이상 이또한 별종의 선민사상일뿐이라고 로마인은 생각했다.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에 의해 1896년 쓰여졌고, 1951년에 머빈 르로이 감독에 의해 제작되어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가 열연한 영화 쿼바디스(Quo Vadis, Domine) 중에 상징적 신 하나가 있다.
로마 유수의 지식인으로 황제 내로의 측근이기도한 페트로니우스를 로마에서 포교활동 중의 성베드로가 찾아와 예수교로 귀의할 것을 열심히 권한다. 이에 대해 페트로니우스는 이렇게 받이친다.
<당신의 설교는 분명 옳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어야할 때는 스스로 毒盃를 들어야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내버려두기 바란다.>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예수교다.
예수교 입장에서는 방치할 수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유일신이며 그 신을 믿지않는 사람은 참종교에 눈뜨지 못한 불상한 사람이므로 거기서 구원해 주는 것이야말로 예수교인의 사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인의 눈에 비친 예수교인의 지나친 절개는 다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오만불손했던 것이다.
베드로와 달리 좀 전투적 성격의 바올로가 그리스인 布敎 도중 많은 신들에 받쳐진 神像의 배열 맨 뒤의 하나에는 <아직 알 수없는 神에...>라 쓰인 신상을 보고 소리지르듯 단정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唯一神이다>
이에 그리스인들이 분노해 바올로를 쫓아내버렸다.
아직 알려지지않은 神이라함은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데가 있다는 겸허한 심정의 표현인 것이다. 그것을 건방지게 바올로가 단정해버렸던 것이다.
로마大火災의 범인으로 예수교인을 지목하고 일망타진이 아니라 고구마줄기 거두듯 하나씩 엮어 처형한 사람이 몇명인지 기록은 없다.
후세 사가들이 추측하건데 예수교공동체로 미루어 2 3백명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한 수면 예수교인들에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것이리는 의미이다.
처형장은 바티칸에 있는 경기장이었다.
일부는 짐승 가죽을 뒤집어씨워 들개떼에 물려죽이고 다른 일부는 로마시대 일반적인 처형법인 십자가에 걸어 죽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밤 구경꺼리로 남겨 두었다가 기둥을 줄지어 박아새우고 거기에 매달아 홧불로 태와죽이는 화형집행이었다.
타오르는 사람기둥의 불길은 관객석에서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환히 비쳤다.
네로도 경기장 안에 끌어다 놇은 4두마전차에 타고앉아 사람불 구경을 했다.
예수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이반된 민심을 돌리려 했으나 로마인들은 참혹한 처형을 보고 오히려 네로에 대한 반감이 더해갔다.
마침내는 스페인속주총독 가르바의 로마진군 보고를 받고 겁에 질린 네로는 로마 근교 한 해방노예의 별장에 숨어 자살로 통치 14년, 나이 겨우 30에 기원68년 6월 9일 생을 거두었다.
네로는 어머니도 죽이고 누이동생도 죽이고 스승 세네카도 죽이고 반역죄를 뒤집어 씨워 숙원의 파르티아문제 해결사 코르불로 등 방위군사령관 3명을 비롯한 수 십명의 무고한 인재들을 죽여 인륜을 철저히 저버린 겁쟁이 폭군으로 로마사에 가장 악명을 남긴 황제였다
네로는 칼리굴라와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었다
그의 죽음으로 카에사르에서 시작된 율리우스 크라디우스家의 황통은 여기서 맥이
끊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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