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52-
老 스토아철학자 세네카의 등에 엎여 등단한 16세 어린 황제 네로-1-
5대황제 16세의 클라디우스 네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2대 황제의 통산 67년의 축성과 수성과정에서 다져진 기반 위의 로마제국에 통치 위기가 찾아온다.
직계 혈통으로 황통이 계승되지 못한 황실에 잦은 분란이 일고, 계승하는 철부지 황제들의 통치력 미숙과 자리다툼은 마침내 3대 칼리굴라, 4대 클라디우스 황제의 피를 불렀다.
3대황제에 오른 24세의 청년 칼리굴라는 2억 7천만 세스테르디우스의 막대한 상속 흑자재정을 요새말로 치면 빵과 서커스라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탕진하고도 모자라 황실가구까지 경매에 부치는 수모를 겪고 마침내는 충복의 손에 妻子 함께 피의 비극을 맞았다.
기원41년 1월 24일 로마시민을 초청한 대축제 후 황실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즉위 불과 4년만의 참사였다.
4대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선제 칼리굴라의 비극과 함께 등위하여 선제의 생모 아그리피나에 의해 독살되는 비극을 맞았다. 기원54년 10월 13일, 재위 13년만이었다.
비운의 두 황제를 이어 마침내 로마사에 악명을 떨친 네로가 등장한다.
이후, 로마 황실의 황모로서 유일무이한 수상록 저술가로 알려진 아그리피나(63)의
음모로 아들 16세의 네로(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가 기원54년 원로원에 의해 全權이 부여된 제5대 황제로 등위하여 기원 68년까지 14년간 善政 惡政을 펴고 종당은 자살로 마감하는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
책임 있는 공직에 취임하려면 30세가 되어야하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었으나 네로는 이례적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등위 당초의 네로의 인기는 같은 젊은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지지율에 뒤지지않았다.
그것도 전 황제의 통치실책으로 평화가 위협 받고 경제가 절박하니 어떻게 해달라는
사람들의 불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며 황제의 책무는 2대 중요사안, 즉 안전과 빵의
확보이지만 그것 역시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이 바란 것은 앞 3대에 걸친 비서정치 즉, 해방노예에 의한 宦官정치만은 종지부를 찍고 원로원 중심 정치로 되돌려야겠다는 의도였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원로원계급의 1인자로 불리우는 스토아철학자 세네카(Lucius.A.
Seneca)였다.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된 지식인 세네카가 초고해서 네로가 원로원에서 읽는 신황제의
시정연설은 다음 4개 항목으로 요약되어 있다.
첫째,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한다.
둘째, 원로원이 갖는 권리를 존중한다.
세째, 사법권에 대해서 황제는 관여하지 않는다.
네째, 私邸(Domus)와 官邸(Res Publica)를 분리한다.
열여섯의 어린 황제는 이 4개항을 동판에 색여 보존해서 매년 초 새 집정관 취임식에
낭독하도록 했다.
첫째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란 정체는 공화정이나 통치상 총괄 지휘는 로마시민 중의 제1인자(Princeps)에 위탁하는 시스템으로 원로원은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안한 불확실한 정치체제, 이 <델리케이트한 픽션>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치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 정치로의 복귀 선언을 한 네로는 원로원으로부터 환영
을 받았다.
따지고보면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디우스 세 황제들도 제1성은 '아우구스투스로 돌아간다'였으니 네로까지 그런다면 네 황제 모두가 그랬다는 셈인데, 아이로니한 것은 네 황제 모두가 원로원의 악평에서 자유롭지 않은 결과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네 황제들이 당초의 선언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간단하다.
그러나 참 문제는 그런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 정치를 한다고 말하면서 그 본질을 살릴 수있는 냉철한 지성이 부족한데 원인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래 60세 노학자 세네카는 황제가 냉철한 지성을 갖춰 선정 실현을 바라는 뜻의 열의가 담긴 <관용에 대해서(De Clementia)>란 저서를 써서 청년 황제 네로에게 바쳤다.
스페인 태생의 세네카는 그의 저서 속에 로마 본토인 이상으로 同情과 寬容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명구를 담아 애제자 황제 네로를 교육했다.
그는 책 속에 동정과 관용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同情이란 당장 눈 앞에 나타난 결과에 대한 정신적 대응인 것일뿐 그 결과를 낳은 요인까지는 마음이 미치지 않는다. 이에 반해 寬容은 그것을 낳은 요인까지를 마음에 둔 정신적 대응이라는 점에서 知性과도 완벽하게 공존 할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대단한 교사의 덕을 보았다고할 네로였으나 교육의 성과는 가르침을 주는쪽보다 받는쪽의 자질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결과로 나타난다.
性善說에 입각한 세네카의 저술은 일종의 君主論이지만 천 4백년 후에 씌여지는 性惡說에 근거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는 다른 성격의 군주론이었다.
군주론 즉, 리더십의 지침서로서 서양문명 3천년의 역사 가운데 고전으로 남은 것은
후자 마키아벨리의 것이라는데에 어쩌면 아이로니를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군주 즉, 리더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냉철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명교사 세네카의 가르침을 받은 황제 네로의 슬로건은 그 시대 通貨에도 관용이라는 구호< Clementia>가 가장 많이 색여져 제국 전영에 통용되었다.
아무튼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로 복귀한다고 선언한 네로의 성의는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한 복잡한 <델리케이트한 픽션>을 실천한다는 것은 지식인 세네카조차 이해하지 못한 탓일까.
평가는 나중한다치고 취임 초기 네로와 보좌관 세네카의 통치능력을 묻는 시금석은
원로원 대책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전통적 숙제 파르티아문제(현 페르시아)의 해결이
었다.
기원54년 깊은 가을 동방의 숙적 파르티아軍이 로마동맹국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는
급보가 로마에 날아들은 갓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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