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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50-
2대황제 티베리우스의 즉위와
젊어 한때 불러보지 않은 사람 없을 만큼 유명한 이탈리아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
유명한 관광휴양지 나폴리灣 남쪽에 소렌토半島가 삐져나와 있다.
여기로부터 1킬로 가량 떨어진 나폴리만 어귀에는 카프리 섬이 떠있다.
지금은 국립공원화했지만 2천년 전 폭발해서 도시 하나를 매몰시킨 베수비오火山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 나폴리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는 고대로마 부호들의 별장지였다.
거기 하나 카프리 섬에 로마의 2대황제 티베리우스가 통치말년 은둔하여 로마를 원격통치했다는 이야기는 요 앞서 사진과 곁들여 설명한 바다.
해발 350미터의 벼랑 위에 2천년 후의 지금도 유적이 남아있는 대형 貯水槽를 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얼마나 주도하게 은둔거처를 만들었는가를 짐작케한다.
티베리우스는 가출 전과가 있다.
36세에 아우구스투스 시절 라인강 방위사령관직을 털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그리스 로도스 섬으로 가출하여 7년간 로마도 지위도 가족도 버린적 있다.
카프리 섬 은둔은 33년만만 두 번째 가출인 셈이다.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딸 율리아와 재혼한 티베리우스는 율리아의 저속한 기질에 진절머리 나는 결혼생활을 참을 수없어 차라리 가출했으나 직계손을 보지못한 아우구스투스는 황통 계승자로 마지못해 티베리우스를 養子해서 후계자로 지명한 것이다.
帝位에 오른 티베리우스의 군사적 업적이나 역량은 제국을 통치하는데 조금도 손객이 없었다.
즉위 초기에 신황제의 통치 헛점을 노려 대우개선을 꾀해 일어난 라인강 방위 8개사단의 반란도 아들 도울수스와 게르마니쿠스 두 젊은 현지 지휘관들의 기지로 소수 희생자만 내고 무난히 진압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트의 후처 리비아가 데리고 들어온 로마 제1의 귀족 티베리우스 크라디우스 네로家의 맏아들로 앞서도 말한바 능력이 출중해 양자로 입양되어 황통을 계승했다.
한편 후처 율리아는 초혼녀로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역 아그리파에 재취로가서 3남매를 키우고 아그리파를 사별한 뒤 티베리우스의 후처로 개가한 아우구스트의 무남독녀였다.
그 율리아에게는 딸 아그리피나, 아들 루키우스와 가이우스가 있고 딸 아그리피나는
아버지의 적 안토니우스의 손주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하여 3대 황제가 되는 카리굴라와 네로, 도울수스 등 6남매를 두었다.
후세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형이 세습하면 동생들을 죽여 후환을 발본해버리는 전통이 있어왔듯이 더구나 이렇게 혈통이 복잡한 어가에는 반드시 세습싸움이 있게마련이라는 것이 사가들의 견해이다.
과묵한 성격의 티베리우스는 황궁 내 여인들의 수다에 진저리를 치고 기원27년 슬며시 로마를 빠져나와 카프리 섬에 은둔했다.
인간의 심성은 남이 나를 싫어하는 것보다 내 친족이 나를 싫어하는데 더욱 열이 바치듯이 티베리우스도 한 인간으로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으로 자부하며 티베리우스에 사사건건 구설을 뿌려온 아그리피나는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올가미에 걸려든다.
통치 말년 카프리 섬에 은둔한 티베리우스는 근위군단장 세아누스를 시켜 아그리피나의 반역죄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법정에 세워 일족을 유배형으로 다스렸다.
아그리피나는 <국가의 적> 죄목으로 벤토테네 섬에,아들 네로는 폰티아 섬에 유배형을 내렸다. 다만 반국가 음모를 했을뿐 실행은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면한 결정이었다.아직 어린 둘째 아들 도울수스는 파라티노 언덕의 황궁 지하실에 유폐시켰다.
형식상으로느 티베리우스의 며느리벌도는 아그리피나와 역시 아들벌되는 도울수스는 유배 중인 섬에서 서기33년 각각 죽었다.
서기27년 카프리 은둔, 29년과 30년 두해에 걸쳐 아그리피나 일파의 반국가음모를 일소한 재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국 초기에 제정한 국가 양대 기본법인 율리우스국가반역죄법과 간통금지법 중 전자에 근거한 것이었다.
통치자로서의 티베리우스를 높이 사는 현대의 연구가들은 아그리피나 일파의 숙청에 손발로 부린 근위군단장 세이아누스를 제위 찬탈음모로 처형한 31년에는 은둔처에서 로마에 돌아와 직접 제국통치를 하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끝내 로마에 돌아오지 않고 37년 3월 16일 나폴리만 서쪽 미세노의 별장에서 77세 파란만장의 생애를 마감했다.
사가들은 티베리우스 치세 초기 10년은 군말 없이 선정이었고 그뒤 7년은 선정 악정이 교차했으며 최후 6년은 악정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카에사르의 제국설계를 초대 아우구스투스가 축성하고, 2대 티베리우스가 로마재국 천년의 기반을 공고히 다졌다는 것이 또한 로마사가들의 평가이다.
가까이는 여러 여자를 거느림으로써 家系가 복잡해진 북한 김일성家의 족벌통치가 그러하듯이 권력과 부를 거머쥔 제왕 세습을 둘러싼 어가소동은 동서고금 다르지 않다는 역사교훈을 여기서 읽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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