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4, 카에사르-폼페이간 世紀의 대결, 파르살루스大會戰 (2)

그리스 중부 테살리아지방의 BC.48년 파르살루스(Pharsalus)회전장의 현재
前夜 이야기
BC.48년 8월 세기의 대회전장에 집결한 양군의 임전태세는 서로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카에사르측은 명목상 반군의 입장이라면 폼페이우스측은 아직은 정부군의 입장이었다.
전술한 바,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탈출 할 때 합헌적 원로원 의원 다수와 집정관 등 정부인사 다수를 데리고 왔다. 그들 민간인 모두가 로마공화국의 합법적 직위를 가진 요인들로서 이를테면 반군에 쫓겨 그리스에 遷都를 한 셈이었다.
폼페이우스 명령으로 군이 이동하면 그들 정부요인들도 반드시 따라 이동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에서 10분의 1 屬州稅까지 징수하며 본국서와 못지않은 상류급생활을 누렸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은 벌써 승리한 거나 다름없는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폼페이우스를 따라 19개월 전에 로마를 도망나와 그리스에 와 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이미 수도에 개선이라도 한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입을 열었다.
<폼페이우스는 어떤 일에도 신중히 임하는 성격이므로 이번만큼은 회전이기때문에 하루면 일을 끝내줄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신중함 뒤에는 우리 집정관이나 법무관 등 경력자들에 명령을 내려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에 쾌감을 느기고 있음이 틀림 없다>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지방에서는 현지 왕후들보다도 높은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로마원로원 의원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결전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귀국 후의 공직 배분을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했다. 그것도 결전을 눈앞에 두고 전략전술을 다듬어야 할 작전회의 석상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한심한 것은 카에사르 쪽에 붙은 원로원 의원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자기들이 나눠갖는데 의견을 뫃으고, 내년도 법무관에는 시리아방위에 가있는 힐리우스를 앉혀야한다는 등 자리다툼까지 했다.
카에사르가 맡고 있는 最高神祗官(신지관)은 폼페이우스의 장인되는 메테루스 스키피오와 집정관 경력자인 최고령자 렌토울스가 서로 자기차지라고 다퉜다.
그밖에 소위 文臣들의 잠꼬대는 여기에 다 나렬하기도 힘들다.
속된 말로 그들 文臣들이 <재에는 마음 없고 잿밥에만 마음 있다>는 우리의 속담을 떠올리게하는 2천년 전 로마인들의 행실을 보고 필자는 6.25전란시 부산 임시수도에서 전쟁은 어떻게 되던 정치싸움으로 날을 새던 그 시절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가 연상될 뿐만 아니라 북의 전쟁광 앞에서 제잘났다고 노닥거리는 지금의 청치판이 얼마나 가증스런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 번도 적전 후퇴를 모르는 상승의 폼페이우스는 문신들의 환상적인 무책임한 발언에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입을 열었다.
보병이 2배,기병에서는 7배의 전력을 투입하여 카에사르군을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괴멸시킨다고 전제하고
<나의 약속이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무리는 아니다. 하나, 내가 생각한 전술에 귀를 기우리면 편한 기분으로 회전에 임하게 될 것이다.
전투 개시와 동시에 기병대가 카에사르의 우익에 맹공을 가해 아군 본대가 본격 전투에 드러가기 전에 적의 주력을 제압하고 적 배후로 돌아 개천쪽으로 몰아 포위를 완성한다.
이렇게해서 회전은 아군 본대인 중장보병이 적의 공겨에 노출되기 전에 희생자 거의 없이 회전은 완승으로 끝날 것이다. 이 전술운 아군의 기병력의 우세로 미루어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있을 것이다.>
회전의 교과서적 전술의 답습이었다.
폼페이우스 진영의 작전회의는 이렇게 김치국 마시는 사람들로 들끓는데, 한편 카에사르 진영은 어떠했는가.
會戰의 꽃 騎兵이 7 대 1의 열세라면 막말로 이는 고양이 앞에 쥐다.
이런 전력 차를 가지고는 알렉산더 할아버지라도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전 회 말미에서 말했듯이 카에사르는 한니발을 눞힌 스키피오 이래 로마군이 백 5십년간 전법으로 익혀온 교과서적 전술로는 가망 없다는 것을 미리부터 깨닫고 있었다.
카에사르는 타고난 지략으로 갈리아戰役의 알레시아전투에서처럼 소수가 다수를 이기는임기응변의 전술을 개발하여 연일 병사들에게 훈련시키고 있었다.
카에사르는 폼페이우스군이 파르살루스평야애 들어와 진지를 구축한 다음날부터 병력을 바께 내보내곤 했다.
도우라큠포위전에서 패퇴한만큼 병사들이 아직 덜치지 못한 패배의식을 일소할 필요가 있기 대문이다.
첫날은 적진으로부터 5킬로 지점에 포진시켰다.
다음날부터는 포진지를 조금씩 앞으로 전진시켜 폼페이우스군의 진지 가까운 고지 밑에까지 접근시켜 카에사르 자신이 직접 적진용을 관찰했다.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이렇게해서 읽은 그는, <갈리아戰記> 속에 "교과서대로 대처해서는 이기지 못한다"고 쓴 카에사르였다.
폼페이우스의 전술은 교과서대로 보병이 무뭇거리는 사이 기동력 있는 기병이 뒤돌아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전법은 말하자면 알렉산더대왕+한니발+스키피오 나누기 3인 것이다.
7배의 기병력을 가진 폼페이우스로서는 적합한 전법일지라도 그 7분의 1 전력의 카에사르로서는 교과서의 답습은 불가능했다.
카에사르는 알렉산더도 한니발도 또 스키피오도 하지 않은 전술을 찾아야했다.
잛은 시간에 새로 고안해낸 소수에 의한 다수의 포위섬멸전술은 망아지를 이용한 이른바 기병력 교란전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