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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46-
Trajan's Bridge Serbian: Трајанов мост Romanian: Podul lui Tra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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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rtistic reconstruction
103-5년 세르비아의 도나우강에 건설된
길이 1135m의 트라이아누스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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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 게르만의 로마化 정책시도는 20년만에 중단되다
카에사르에 대한 후세의 평판과 함께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이런 내용이 실려있다.
<지도자에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知性, 說得力, 육체적 耐久力, 자기 制御力, 하고자하는 勤氣.
카에사르만이 이 모든 것을 충족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도 하고자하는 근기와 자기 제어력에 있어서는 카에사르에 뒤지지않았다.
두 義子에게 아직 평정하지 못한 對게르만 방위전선을 맡기고 행정개혁을 통한 내치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보다 백년 후의 그리스인 플루타르크는 <영웅 열전>에서 로마가 융성하는
이유를 패자마저도 자기들과 동화하는 로마인의 차별없는 융화정책이라고했다.
일견 역설같지만, 그 민족이 문명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제패가 용이하고 문명도가 낮은만큼 제패가 어렵다는 것을 로마의 세계정복사가 지금까지 보여주었다.
로마인 말대로 문명인이라면 문명화가 되는 것 즉, 로마化의 이점을 이해할 수있다.
로마街道網으로 상징되는 인프라 정비라든가 각지에 공인된 自由都市와 로마시민을 이주시킨 植民都市를 중심으로한 경제 활성화의 이점을 그들이라면 빨리 이해할 수있었다.
또, 로마 制覇 하에서는 국내분쟁이 소멸되고 국외 적으로부터의 위협은 로마軍이 지켜준다. 민족 고유의 문화는 물론 종교나 언어를 비롯해서 통화까지도 정복자 로마의 그것으로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로마인 최고의 덕목은 저들만이 무엇이든 할 수있고 저들만이 이것도 저것도 다 하려고 하지않았다는 데에 있다.
로마 제패 하에 살아가는 각 민족에는 각기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분야에서 활동기회와 무대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명을 모르고 살아온 민족에 문명에 의한 혜택을 납득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일이다.
특히 蠻族인까닭에 都市化가 되어있지 않고 거점을 공략해서 전과를 거둘수 있는 전략은 먹혀들지 않는다. 또한 부족마다 독립 경향이 강한 그들에게는 단결해서 로마에 싸움을 걸어오는 경우도 적었다. 그들에게는 게릴라전만이 유일한 전술이었다.
로마군 특유의 평원 가득 포진해서 일전을 겨루는 會戰방식에 의한 전투능력도 발후할 기회가 극히 적었다.
로마군 자체에도 미개인을 상대로한 본격적인 제패행위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탈리아반도 통일 후에 로마가 싸운 상대는 카르타고, 그리스, 시리아, 이집트 등 어느 국가도 문명도가 높은 민족이었다.
실전 지휘 경험이 미약한 아우구스투스가 오른팔 아그리파를 잃고 의존한 티베리우스와 도울수스 형제를 북방 방위선 라인강과 도나우강에 투입했으나, 카에사르가 더이상은 국력낭비라 보고 고정한 라인방위선을 엘베강까지 밀어 올리려다 고배를 마셨다.
젊은 라인방위사령관 도울수스의 군사적 재능은 탁월했다.
4년간 3회에 걸친 攻略을 한번도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았다.
최후의 원정은 라인강 연안 지금의 독일 마인쯔였다.
출발지점에 대한 게르만족의 공격을 교란시킬 목적이었다.
도울수스의 마지막이 된 엘베강 진격을 만치고 로마군이 라인강으로 귀환할때는 계절이 바뀌어 이미 게르만 북부는 겨울을 맞았다.
凱旋軍을 인솔하고 눈 쌓인 길을 오던 도울수스가 원인 모를 落馬를 했다.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라인강 본진에 돌아와 상처가 악화해 병상에서 도나우강 동영지서 급거 달려온 형 티베리우스의 가슴에 안겨 스물아홉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정착민족인 갈리아 정복에 천하 명장 카에사르도 8년 세월이 걸렸다.
하물며 수렵과 약탈의 정처없는 떠돌이생활로 야만족으로 살아오는 게르만족을 정벌하여 로마문명권에 동화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로써 로마의 방위선 단축을 위한 라인강방위선의 엘베강으로의 전진구축 시도는 중단되고 카에사르의 원안으로 회귀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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