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帝國篇-43-

로마제국이 당시 속주 세고비아(스페인)에 부설한 상수도의 高架水路 유적,지금은 관관명소로 방문자들에게 전혀
다른 고대의 상수도 개념을 전해준다.
인프라의 또하나 생활용수의 안정적 공급시스템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상수도가 가설된 것은 앞서의 가도망편에서 기 언급한 바있는 재무관 아피우스에 의해 가도망 부설과 같은 해인 BC.312년으로 꼭 2천 3백년 전이다.
수도도 가도와 마찬가지로 아피아수도(Aqua Appia)로 명명되어 지금도 로마시내 곳곳의 분수대에서 시원스레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로마시의 공중수도는 70m 간격으로 설치되었어 집에서 멀어야 40m 이내였다.
수도의 길이가 도로처럼 무한히 뻗을 필요는 없지만 가설 여건이 지형적으로 기술적으로 도로와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 있다.
요새처럼 광관이나 동관이 없던 시절 물의 흐름의 원리를 이용한 통수공사는 누수도
증발도 막고 오염도 방지해야하는 등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통수관은 석재를 다듬고 이미 널리 사용되어온 시멘트가 사용되었다.
수원 탐색으로 시작된 공사는 가장 청정한 수원에 취수구를 설치하고 지하에 도수관을 묻어 공급지까지 연결하며 군데군데 침전물을 걸러내는 저수조를 철치한다. 계곡을 만나면 고가도(위 사진)를 가설하거나 낙차의 힘을 이용한 사이폰식을 채택한다.
이렇게해서 소비지까지 끌어온 물은 公共용과 私용으로 소비자에 공급되는데 공공용은 공중목욕탕과 공동수도, 공원의 분수나 도시 시설용으로 공급되고, 개인의 사용으로
황제의 허거를 받아 단돋주택에도 공급된다.
이때 공공용수는 무료 공급이지만 개인의 사용에는 반드시 시설비와 물값이 부과된다.
로마에는 BC.312년에 가설된 <아피아수도>를 비롯해서 BC.3세기 카라카라帝가 세운
공중목욕탕을 위해 부설된 <안토니니아나수도>까지 모두 11개의 수도가 부설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구 백만을 육박하는 로마에 공급된 수도의 시설용량이 과연 얼마일까?
고대 기록으로 남겨진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아피아水道=전장 16.517Km(지중 16.528Km, 지상 89m) 일 공급량 70,368입방m
2. 구 아니오수도=전장 63.680Km,(지중 63.352Km, 지상 328m) 175,920
3. 마르키아수도=전장 91.64Km(지하 80.56Km, 지상 11.08Km) 185,600(현재 302,400)
4. 테프라수도(공화정 말기 20년의 내전기에 유명무실해져 기록이 없음)
이상은 공화정 시대의 상수도 공급 현황이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정에 와서 팍스-로마나가 실현되면서 제국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수도는 가도와 더불어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반도 내 도시와 속주에까지 보급이 확산된다.
르네상스기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면 지도자의 유형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자기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가는 직접형과 타인에 맡기는 간접형이다.
카에사르가 전자라면 아우구스투스가 후자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이 끝나고 일등공신 협력자 아그리파를 버리지 않았다.
카에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기 전 스페인원정에 동반한 그에게 벌써
군사재능이 없음을 보고 동년배의 재능이 뛰어난 마르쿠스 아그리파를 오른팔로 삼아
주었던 것이다.
아그리파가 오르팔 노릇을 안했더라면 아마도 2大決戰, 부르투스와의 필리피會戰도
안토니우스와의 악티움海戰도 아우구스투스는 이기지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런 아그리파를 전쟁이 끝났다고해서 용도폐기는커녕 평화건설에 중책을 맡긴것이다.
뛰어난 무장은 조직력도 탁월했다.
전원 노예로 구성된 2백 4십명의 기술자집단을 조직했다.
기술자집단을 이끈 아그리파는 로마에 최초의 대규모 공중목욕탕 <아그리파浴湯>을 비롯해서 시민 휴식처로 <비프사니아廻廊>과 <아그리파湖水公園>을 건설하고 다음 3개의 수도를 추가 부설했다.
5. 율리아수도=전장 22.9Km(지하 12.5Km, 지상 10.4Km), 일 공급 103,846입방m
6. 비르고수도=잔장 20.946Km(지하19.104Km,지상842Km,고가수로1Km),103,846입방m
7. 아르니에티나수도= 전장 32.9Km(지하32.39Km,지상 고가수로510m) 공업용수 전용
모든 기반시설이 그렇듯이 건설 후 메인테넨스가 따르지 않으면 시설의 효용성과 수명이 떨어지기마련이다. 도로 수도 건축물 등 모든 시설들이 로마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것은 역대 통치자에 의한 인프라의 유지관리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港灣 건설이 우선이었던 한 시기에 중단된 상수도 시설공사가
재개된 것은 AD.52년 8월 1일 황제 클라디우스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통수식이 거행된
<크라디우스수도>가 로마의 여덟번째 수도가 되면서다.
8번째, 클라디우스수도=전장 68.9Km(지하53.8Km, 지상5.5Km,고가9.6Km) 191,196입방m
9. 아니오수도=전장 87.17Km(지하73.20Km,지상4.33Km,고가9.64Km) 196,627입방m
10번째 트라이아나수도는 좀 다른각도에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마의 인구가 120만으로 팽창하여 서편을 흐르는 테베레江 건너에까지 거주하게되면서 강 서쪽에 건설된 첫 수도가 된다.
5현제의 하나인 투라이아누스황제가 건설한 이 열번째 수도에 관한 자료는 교황청이
사용하게되면서 여러번 개보수가 이루어져 그 기록이 불분명해졌다.
특히 로마법황청은 물공급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水道名이 황제의 이름이라는 이유로 트라이아나수도를 교황 이름을 따서 <聖바울수도>로 고치고 하루 9만 5천입방m의
물을 현재도 테베레강 서안 일데에 공급하고 있다.
로마의 11번째의 마지막 수도가 <안토니니아나수도>이다.
당시 로마에 급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남아있는 <카라칼제대욕장>에 물을 끌기 위해 만들어진 수도이다.
열번째 신아니오수도가 완성된 AD.1세기 중반 로마에 수돗물 공급량은 100만 입방m가 넘어 일일수요를 충당했다.
현대 전문가들은 송수 중의 손실량을 반으로 추정하지만 1세기 로마의 1인당 1일 급수량은 1입방m, 20세기 1983년의 유엔통계에 따른 뉴요크 0.6, 런던 0.5, 파리 0.45,
로마 0.46 입방m와 비교하면 2천년 전 로마인들은 물 사용량에 있어 20세기를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식구들의 연명을 위해 호리병에 구정물을 기러가는 맨발의 아프리카 오지 여이들의
모습이 목욕탕에서 콸콸 쏟아져 나오는 물을 만끽하는 로마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로마가도 간선이 통과하는 도시면 반드시 로마수도가 흐르고 있다고보아 틀림 없다.
본국 이탈리아의 소도시 폼페이는 단 하나였으나 속주 갈리아(프랑스)의 최주요도시
리용같은데는 4개선의 수도가 건설되었다.
수원지에서 멀고 가깝고도 아니고 도시의 중요도가 아니라 지세에 따라서 결졍되었다.
수도의 길이에 있어 파리 16K,알제리의 알지에 35K,님 50K, 리용 4개선 중 최장이 75k,케른 78K, 사막 저멀리서 수원을 찾아야했던 카르타고는 132K나 되었다.
가도가 일관된 정치의도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수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도는 엄연히 군사용 우선임으로 로마 중앙정부가 일체 에산을 부담했지만 수도는 민수용이므로 건설비나 유지관리비 모두가 수익자부담원칙에 따라 지방정부나 속주 또는 당해 도시가 부담했다.
수도의 개념조차 모르는 변방 속주에 전문가를 파견해 기술지도까지 하는 등 실현에 집착한 것은 물의 안정 공급도 훌륭한 문명의 척도라고 로마인들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