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38-
(BC.30년 주조의 옥타비아누스 金貨)
*미모와 지혜를 겸비한 인간 아우구스투스, 그는 대관식 없는 제왕역할로 평화(Pax-Romana)를 실현한다.
17세 소년 옥타비아누스가 카에사르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을 때, 무골형의 안토니
우스는 그를 가리켜 미소년이기 때문에 후계자 되었다고 험담을 했다.
소년시절의 미모는 역사의 무대에 끌려나와 14년 간, 처음에는 브루투스를 상대로,
다음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싸와 이긴 自信이, 타고난 미모를 더욱 보강해 주었음
인지 30대 미남의 곷을 피웠다.
그러나 그의 미모는 겉보기 이름다움뿐이 아니었다.
그 얼굴은 말을 할 때나 남의 말에 귀를 기우릴 때 무한히 해맑은 표정으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어 상대에게 용모 이상의 아름다운 인상을 주었다.
고대로마史家 스베토니우스는 흔치 않은 미남이었으나 사치하지 않았다고 쓰고있다.
타고난 미남이었으므로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지만 그 자신은 30대
후반부터 최고조에 달한 자기 미모의 효력을 알았다.
그 옥타비아누스가 14년간 내란을 수습하고 BC.29년 8월 개선식을 마친 다음 9월에
養父이기도한 神君카에사르에 바칠 神殿을 로마광장 중심부에 건립한다고 공표했다.
아우구스투스(권위)호칭을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7년 연속 집정관 겸 제1인자로서
戰爭神 야누스神殿의 문도 닫힌 평화회복기에 전후처리는 물론 국가재건사업 프로그
램을 쏟아냈다.
BC.29년 당시의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한 개선장군이 아니었다.
BC.82년 당시의 스쯔라, BC.46년 당시의 카에사르와 같이 유일한 절대권력자의
입장이었다.
스쯔라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패자 마리우스파에 속한 사람들의 명부이며, 폼페이
우스에 이긴 카에사르의 수중에 들어온 것도 폼페이우스파의 숨은 동조자들의
편지까지 포함된 적대 증거물들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
측 사람들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손에 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처리방법이 3자 각양이었다.
스쯔라는 그것을 근거로 반대파를 철저히 숙청했다.
4천 7백명의 로마의 유력자들이 죽거나 자산 몰수되고 자손들까지 공직 추방의 징벌
을 받았다.
카에사르는 증거서류에는 눈도 안돌리고 태와버렸다.
그리고 폼페이우스파였다는 사실이 분명한 숨은 동조자도 불문에 부치고 전원 방면했다. 카에사르로서 용서하는 것은 공직복귀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이 카에사르의 관용을 카에사르 후계자로 자타 함께 인정하는 옥타비아누스도 답습
했다.
최후까지 안토니우스를 버리지 않은 사람까지 원로원 의석에 앉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증거서류는 태와 없애지 않았다. 34세의 절대권력자는 구 안튜니우스파
사람들의 감춰진 두려움을 못본척 방치하고 심리적 불안을 씻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에사르의 암살을 경험한 옥타비아누스의 무섭도록 철두철미한 인간관리 스타일이
었다.
전후 재건사업 제1호는 각종 공공건물과 도로망 건설 보수사업이다.
로마인이 곡공사업으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인프라스트럭쳐의 정비다.
오늘날의 사회간접자본이라는 말은 벌써 고대로마시대부터 자리잡은 개념이다.
옥타비아누스가 최고권력자가 된 직후에 실행한 인프라정비의 최중요공사는 전액
사비를 들여 로마에서 북쪽으로 달리는 간선도로 두 개 중 하나인 프라미니아街道의
전반적 보수작업이었다.
악티움海戰 승리에 감사를 표시하는 아폴로神殿도 국립도서관 옆에 세워졌다.
수십년만에 로마에 건설의 망치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번째가 군비삭감이다.
로마의 위 아래 모두가 融和의 회복을 환영하는 가운데 젊은 절대권력자는 그것을
보다 구체적 정책을 통해 실현한다.
사실상 군 지휘권을 행사해온 아그리파의 동의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이었다.
BC.29년 당시 유일한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 밑에는 방대한 군사력이 남아 있었다.
그 자신의 기록에는 안토니우스측에 있던 군사까지 합해 50만이 넘었다.
이 팽대한 군사력을 평화시에 유지해야 할이유가 없다고 본 그는 대폭감축을 단행한다.
로마시민권자인 병사들 하나하나 몸만 내본내는 제대가 아니라 퇴지금과 더불어 새로운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남긴 프톨레마이오스王朝의 재화를 매각해 얻은 돈을 몽땅 털고도
모자라 옥타비아누스 자신의 사재를 보탰다.
병역지원자의 대부분은 무산자이거나 집안의 차남 또는 3남으로 전통대로 제대하면
속주나 식민도시에 토지를 마련하고 정착한다.
군축은 일조일석에 이뤄지지 않는다.
50만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로서 엄청난 군사비부담을 떠안는다.
전시에야 목적세를 부과해서라도 군사력을 증강할 수밖에 없지만 평화가 도래한 마당에 더이상 군비부담은 시민의 원성을 살 수있는 무책임을 아우구스투스는 일찌기
깨달았던 것이다.
장기에 걸쳐 결국 50만 병력을 16만 8천으로 대폭 감축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수단은 달랐어도 목적에서는 카에사르와 생각을 같이했다.
국가 로마는 영토확장 시대에서 영토보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카에사르가 목정을 위해 걷기시작한 것은 50 중반 때로 앞으로 쓸 수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30 중반 남은시간 여유를 가지고
국가 기반을 새로 닦아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