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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 of a bronze equestrian statue of Augustus, 1st century AD
(아우구스투스의 1세기 동상)
로마제국에는 여느 왕국과 달리 황제의 王冠도 戴冠式도 없는 것이 이색적이다.
로마황제는 세습이 아니라 국민의 추대로 제왕에 즉위하는 것이 또한 관례이다.
카에사르는 누님의 딸의 손주벌되는 옥타비아누스를 아무런 경륜도 없는 17세 때 벌써 후계자로 지명했다. 남이라면 남일 수있는 17세 소년을 그가 그린 제국의 초대황제로 삼았다는 것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죽하면 로마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가 누구? 왜? 했을까.
그러나 그는 14년의 카에사르의 암살후유증을 극복하고 로마 제1인자 자리를 쟁취했다.
로마세계를 평정한 그는 제국건설 선포식 같은 극적 전환점도 찍지 않았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호칭, 제왕같은 대접을 해주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정적을 만들지 않고 원로원을 존중하면서 장기간 자연스레 황제로서의 지위를 굳혀간다. 그의 독특한 개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카에사르-옥타비아누스의 20년 役戰의 결실, 帝政로마 시대가 열리다.
BC.30년 로마에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수도를 3일간 열광케한 장려한 개선식을 거행했다. 33세의 승리자에 보낸 시민의 열광은 그가 이룬 승리보다도 드디어 내전이 끝난데 대한 환희였다.
그도 이를 알았다.
그는 야누스神殿의 문을 닫도록 했다.
7백년 전 2대 누마王의 시대로부터 戰爭神 야누스에 바쳐진 신전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은 로마는 전쟁상황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야누스신전의 문이 닫혀지는 기회는 BC.30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었다. 카에사르가 폼페이우스 잔당들의 최후 항전인 스페인의 문다會戰을 종료하고
브루투스 등에 의해 암살되기까지 반년의 평화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호기는 14년이나 뒤로 미루어지고만 것이다.
그 14년은 카에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 단독 승리로 끝났다는데서 도대체 무엇을 위한 암살이며, 무엇 때문의 14년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이탈리아 고교 교과서는 카에사르의 암살을 <회고주의자들의 착각이 부른 백해무익한 만행이었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
국가 로마로서 유일한 수확은 이집트의 영유이겠지만 이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사유지로서였기 때문이다.
BC.44년 봄, 예상도 못한 후계자 지명으로 역사 무대에 끌려나온 18세도 지금은 33세를 맞고 있다.
이미 누구 하나 <옥타비아누스가 누구냐>고 말하는 자 없다.
당시의 소년은 14년을 거쳐서 카에사르가 그에게 준 후계자의 지위를 확실히 다진것이다.
이것은 안토니우스도 아니며 다른 누구도 아닌, 아직은 미지수의 18세 소년을 후계자로 고른 카에사르의 炯眼의 승리이기도했다.
BC.46년, 지금은 리비아령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Thapsus타프수스에서 폼페이우스잔당을 부수고 귀국할 당시 카에사르의 이후 施政 기본방침을 Clemency寬容이었다.
그 16년 후, 카에사르와 마찬가지로 로마세계의 최고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이후의 시정방침을 Pax평화에 두었다. 로마에 의한 평화 즉, <팍스 로마나>의 출발이었다.
BC.44년 3월 15일에 육신으로서의 카에사르는 죽었다
그러나 카에사르가 정말로 죽은 것은 BC.30년이 되어서다.
이미 아우구스투스로 불리운 초대황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카에사르가 타도한 共和政로마 대신 帝政로마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공화정시대의 로마사에는 고전과 다중일치하는 독일의 역사가 Momzen은 카에사르를
<로마가 나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평한다.
그러나 이 천재는 원로원 주도 공화정에의 회고주의자들이 아직 다수였던 시대에
홀로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창조적 천재는 아니었으나 카에사르가 가지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에서 덕을 보았다.
첫째는 회고주의자들이 BC.49년부터 30년까지의 내전에서 일소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그리파와 마에케나스라는 동년배의 협력자를 얻은 점이다.
아그리파는 카에사르의 등용으로 브레인이 되었고 마에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
시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외교협력자로 맞은 브레인이다.
모두 30대 전반의 혈기들에 의해 팍스 로마나는 구축되게 된다.
신생 로마의 출발에 어울리는 젊은 힘의 집결이기도 했다.
사실상 제정로마의 탄생은 BC.49연 카에사르의 루비콘 이후 BC.30년 옥타비아누스의
알렉산드리아 평정까지 20년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지난 20년 民主化라는 수식이 붙은 4代 政權 하 辛苦의 역사를 돌아 보며
금년 2012大選을 待望해 본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