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36-

The Death of Cleopatra by Reginald Arthur (d. 1896), 1892(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시종녀와 함께)
Roy Miles Gallery, London
자결을 할 용기가 없는 비겁한 자신을 본 안토니우스가 노예의 몸에서 칼을 빼
스스로를 질렀지만 상처만 내고 죽지않았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는 죽지않았다는 사실을 전해온
사자가 다시 도착했다. 죽었다고 알려준 것을 후회한 클레오파트라가 사실을
전해온 것이다.
많은 출혈로 사경을 헤매는 그는 몇 남지않은 부하들에 부탁해 클레오파트라 곁으로
옮겨졌다. 안토니우스는 늘 바라던대로 사랑하는 여인 클레오파트라의 품 속에서
죽었다.
그런 식으로 여자에 대한 사랑을 관철하는 것도 남자의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인지 모르지만.....
BC.30년 8월 1일, 안토니우스가 죽든 날 옥타비아누스는 일렉산드리아에 입성했다.
군사에 에워싸여 이집트 수도에 입성한 옥타비아누스가 왕궁으로 향하던 중
안투니우스의 죽음이 전해졌다. 거기에는 아무말 않고 女王을 산채 붇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반항했다.
문을 굳게 잠그고 靈廟 내에 아무도 들이지 않은채 옥타비아누스와 협상하자고 버텼다.
재물을 줄테니 카에사르와의 아들을 왕위에 올려달라는 조건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거기에 아무 대답도 하지않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영묘 안에서 버티는 동안 영묘 상층으로 침칩해 들어간 로마병들에 의해 클레오파트라는 밖으로 끌어내졌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왕국의 존명과 맞바꾸려던 <프톨레마이오스王家의 재물>도 이것으로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돌아온 것이다.
재물이 어느만큼이었는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것이 로마에 반입되고 병사들의 급료와 퇴역병사들의 정착농지 구입자금 그리고 공공사업비로 지출되면서 12%였던 年利가 4%로 떨어졌다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다.
가히 천문학적 금액이었다는 것과 오리엔트의 전제국가에서 富는 君主 일인의 독점물이라는 것에 로마인은 놀랐다.
왕궁으로 연행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그녀의 자식들에 어떤 운명을 주었는지를 비로서 알았다.
왕위를 요구한 17세의 카에사르와의 아들 카에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참살되었다. 카에사르의 아들은 옥타비아누스 하나로 족했기 때문이다.
10세의 안토니우스와의 쌍둥이 남매는 혈통을 찾아 안토니우스의 妻였던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에 맡겨졌고 6세의 막내도 똑같이 로마로 보내져 양육되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왕국 존속의 꿈은 사라지고만 사실에 절망한다.
그러나 이런 운명에 처해 비로서 그녀는 카에사르의 진의를 이해했을 것이다.
카에사르는 유언장에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카에사리온을 실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식을 위해서나 클레오파트라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는 것이 카에사르의 진정이었기 때문이다.
왕궁 안에서 옥타비아누스를 첫 대면한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빈틈 없는 미모의 차가운 표정을 보았을 때 이미 흥정은 없다고 보고 자결을 결심한다.
한 여인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여왕으로서의 죽음을 결의했다.
실은 옥타비아누스도 그러기를 바랬다.
여왕으로서든 뭣이든 이 세상에서 영원히 꺼져주는 것이 그에게도 바람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전성기와는 달리 왕궁 안에 갇혀 사는 신세지만 시종들은 자유롭게 와궁을 드나들었다.
무화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에 독사를 숨겨 들여왔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 간청해 안토니우스가 잠든 무덤에 술을 딸아주겠다며 왕궁을 나와 영묘에 갔다.
시종 둘을 거느리고 감시병들의 호송을 받아 영묘에 간 그녀는 감시병이 문 밖에 기다는 동안 영묘 안에서 독사의 혀끝에 몸을 맡겼다. 시종 둘도 함께 딸았다.
여왕의 정장 모습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 앞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달라는 최후 편지를 남기고 갔다.
젊은 승자 옥타비아누스는 설흔아홉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이 마지막 소원은 들어줘었다.
그리스人 알렉산더大王이 페르시아에 이기고 이집트를 지배한 것은 BC.333년부터이다.
BC.30년, 3백년 이어온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로 이렇게 막을 내렸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공표하고 이집트의 로마영유를 선포했다.
그것도 옥타비아누스 개인 여유로한 것이다.
이집트의 지배자는 인간이 아닌 신의 아들이어야한다는 이집트 전래의 신앙에 따라 神이 된 카에사르의 아들이 맡는 것은 당연하는 이유에서다.
이렇게해서 알렉산더대왕 사후에 대왕의 세 장군들이 창건한 헬레니즘 왕조 그리스 시리아에 이어 최후의 왕조 이집트도 멸망했다.
역사의 가정이지만 이집트가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동맹국으로 만족했다면 맞을 필요도 없는 멸망이었다.
사족이지만, 그리스系가 지배한 헬레니즘 3국들, 이집트가 경제위기의 그리스와 정치위기의 시리아와 함께 지금도 나라가 온전치 못한것은 모두가 세계최대의 문화유산을 가졌다는 공통점에서 참으로 공교롭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