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33-
*안토니우스를 클레오파트라의 傭兵隊長
長으로 만들어버린 옥타비아누스의 집요한 프로파간다
(BC.34년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家에 증여한다고 한 로마세계의 동반부, 그 서단부 그리스 서해안 악티움海戰서 옥타비아누스에 패해 증여선언은 공념불이 됐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家에 로마세계의 東半部를 나눠준다고 공식 선언한 안토니우스는 이 해프닝에 그치지않고 로마에 있는 처 옥타비아에게는 이혼장을 보내고,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로마세계 전체를 東과 西로 二分割할 것을 정식으로 제의했다.
안토니우스의 언동에 아연하면서도 침착하게 입 한번 열지않은 집정관 옥타비아누스는 안투니우스의 정식 제의를 받고서는 즉각 元老院회의를 소집하여 다음 사항을 의결하였다.
1, BC.43년에 결성되고 5년간의 임기가 끝난 38년에 갱신된 5년간의 재임기 중인 <제2차三頭政>은 3차 갱신 없이 종료한다.
2,안토니우스가 결정한 모든 사항은 원로원의 인가를 얻지않았음으로 무효이다.
3, 로마세계의 2분할은 죽은 카에사르의 유지에 반하는 것이어서 議題조차 될 수없음으로 기각한다.
안토니우스에 보낸 회답을 이같은 형식으로 마무리한 옥타비아누스는 그와의 대렬을 필지의 사실로 보고 이릴리아(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地方)제패의 종결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反로마행위를 서슴지 않는 안토니우스 타도를 위해 그와 그를 외인부대장으로 고용한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로마인의 증오심을 북돋울 필요가 있었다.
삼두정은 이미 끝났으므로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공적직위가 아무것도 없이되었다.
로마세계를 분할하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로마인의 감정은 악화되고 따라서 그들에 대항하는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는 강화되었다.
남은 것은 決戰뿐이라는 것을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도 인식을 같이했다.
오타비아누스가 예견했슴인지 이릴리아지방을 사전에 제패함으로써 아드리아海 제해권까지 손에 넣은 그는 그리스에서 임전을 갖추고 있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연합군과의 일전을 위해 이탈리아 남단 브린디시항에서 도해 준비를 서둘렀다.
BC.32년 31세를 맞은 옥타비아누스는 드디어 로마세계를 누가 수중에 넣느냐를 정하는 최후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카에사르의 후계자로서 옥타비아누스는 실로 교묘한 방법으로 개인간의 권력다툼을 국가간의 싸움으로 몰아가는데 성공했다.
敵은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이 로마인을 용병대장으로 고용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라는 것을 로마인 누구나가 인식하도록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한편 東地中海 세계가 총력으로 로마에 도전한 것이 아니다.
안토니우스군에 병력을 보낸 동방의 제후들 하나도 스스로 참전한 자 없이 다만 강요에 못이겨 형식적 파병을 했을 뿐이다.
세파에 닳고 다른 그들도 이 결전이 클레오파트라의 야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개인간의 궐력투쟁이라는 것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범한 잘못을 낱낱이 이용한 옥타비아누스의 집요한 반복적 선전전략의 성공이었다.
BC.32년 가을, 로마본국 지방각지가 총력으로 옥타비아누스를 <국가로마를 지키기 위해 이집트를 공격하는 군의 최고사령관>에 선출했다.
지금까지 안토니우스와 행동을 같이해온 옛 카에사르 휘하엿던 폴리오장군과 프랑크스장군 등 막료들도 사실을 알고 안토니우스를 이탈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장병들의 이탈이 줄을 이었다.
안토니우스라는 사나이는 보수도 많이 주고 병사들과 어울려 놀기도 좋아해 장병들 사이에 인망은 있었으나 안토니우스 측에 서서 조국의 정규군과 싸운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잔류병 대표가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돌려보낼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즉답을 회피하고 결국은 클레오파트라가 진영에 머문채 개전을 맞는다.
소아시아 서연안의 에페소스에서 풍부한 군사자금으로 임전태세를 갖춘 안토니우스에 대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본토에서 전시국채까지 할행해 마련한 자금으로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아드리아해를 가운데하고 東西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또 한차례 세기의 대결,악티움大海戰의 개막을 앞두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베푸주는 酒宴으로 연일 흥청거리고 있었다.
한편,로마에서는 카피톨리노언덕 위 신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출진에 앞선 항례의 祭禮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諸神에 로마의 수호를 빌고 로마군의 승전을 기원하며 적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는 의례였다.
로마人 안투니우스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고 적은 오로지 이국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단 한명뿐이었다.
안토니우스측의 해군은 아테네 외항 피레우스에, 옥타비아누스측 해군은 반도 남담 타란토와 브린디시에 집결하는 가운데 BC.32년 해가 저물었다.
이미 雌雄을 겨룰 수밖에 없이된 카에사르의 養子 옥타비아누스와
카에사르의 옛날 副長 안토니우스는 각기 31살과 50살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