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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31-
| fulvia's civil war |
| Date |
41– 40 BC |
| Location |
Rome, Perusia |
| Result |
Roman victory |
Territorial changes |
Rome was briefly lost, but quickly regained | |
| Belligerents |
| Roman Republic |
Forces of Fulvia and Lucius Antonius |
| Commanders and leaders |
| Octavian, triumvir, |
Fulvia, Lucius Antonius |
| Strength |
| 125,000 |
48,000 | (BC.41-41.안토니우스 처 풀비아反亂당시 군세)
BC. 41년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여왕이 베푼 호사를 누리는 동안 옥타비아누스 쪽은 안토니우스의 획책에 걸려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의 페루지아에서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처 풀비아가 擧兵을 한것이다.
안토니우스를 흔들어 지반을 문어뜨릴 작정이었으나 전투에는 서툰 옥타비아누스도 본국에서 일어난
반란이니만큼 전력을 쏟아 진압했다
로마에 풍운을 몰고온 사내들과 결혼 전력이 있는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세번째 결혼한 이른바 당대의 여걸이었으나 천재형 무장은 아니었지만 BC.40년 2월 말 견실한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역할의 아그리파에 패해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그리스로 도망 중 憤死한다.
정보에 게으른 안토니우스가 페루지아擧兵이 실패한 줄도 모르고 자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존분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집트를 출발, 이탈리아 남단 브린디시港에 입항했으나 예상은 딴판이었다.
안토니우스의 배신행위를 규탄할 작정으로 군사력을 배수진으로 기다리고 있는 22살짜리 옥타비아누스와 막닥드린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당장 태도를 바꿔 페루지아거병 책임을 자기 처 풀비아에 전가했다. 자기와는 상관없이 알지못한 사이 풀비아가 동생과 모의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며 책임을 전적으로 처 풀비아에 떠넘긴 것이다. 그것을 전해들은 풀비아가 그리스 땅에서 분통해 자살을 한것이다.
안토니우스의 변명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척한 22살의 옥타비아누스에게 페루지아사태는 수습되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차남 세크토우스 세력이 로마본국과는 지근거리의 시칠리아島를 수중에 넣을 만큼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에게도 싸우면 이기는 카에사르와는 달리 외교의 필요성을 터득하였다.
동년배의 에톨루리아 출신 마에케나스를 외무장관격으로 등용한다.
페루지아사건의 진위 여부는 묻어두고 마에케나스의 활약으로 안토니우스와 이른바 브린디시協定을 맺아 일단은 내부 평온을 회복하고 레피도우스에게는 아프리카지역을 맡기는 등 3자가 각기 세력권을 東西南으로 삼분하여 로마세계의 패권을 현상유지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차남 세크토우스를 나폴리항 미세나串에 불러들여 적대행위 종결을 위한 미세나協定도 맺는다.
뿐만 아니라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세크토우스 삼자는 협정이행을 보증하기 위해 누이동생들을 주고 받는 정략 결혼도 시도한다. 이 모두 카에사르 설계의 帝國건설의 실현을 위한 옥타비아누스의 고육지책이며 치밀한 장기 포석이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어차피 카에사르는 아니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죽음으로써 복수는 끝났다고 보였으나 모든 적은 죽어야만 끝난 것으로 보는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관용은 없었다. 협정을 어긴 폼페이우스 차남 세크토우스를 도망친 레스보스島까지 추적해서 죽여버린다.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이 착실히 확장된 것을 본 안투니우스는 놀랐다.
그러나 그는 카에사르도 하지못한 파르티아(Parthia 페르시아)遠征에 성공하면 옥타비아누스따위는 제칠 수있다고 자신했다.
이집트로부터 온 클레오파트라의 편지가 원인이었다고 古代史家들은 말하지만 아토니우스는 새로 맞은 아내 정숙한 로마여인 옥타비아(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의 애정에 빠져 클레오파트라를 잊으려고 노려했다.
그리고 간신히 파르티아원정을 출발하기로 결심한 안토니우스는 BC.37년 가을 동쪽으로 향했다.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재회를 약속한 편지를 클레오파트라에 띄운 후의 출발이었다.
편지를 받자마자 클레오파트라도 알렉산드리아港를 뜬다.
파르티아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만재하고 안투니우스는 얼굴도 보지못한 그와의 사이에 난 쌍둥이 자매를 대동한 출범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