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29- LegatusMarcus AntoniusM·ANTONIVS·M·F·M·N Statue of Cleopatra as Egyptian goddess; Basalt, second half of the first century BC. Hermitage, Saint Petersburg
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29-
지난 3회에 걸쳐 카에사르의 죽음에 대한 제국건설파의 伸寃雪恥, 한 풀이하는 이야기를 했다.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라는 키케로도, 지성과 고결성을 자처한 브루투스도 로마가 지향하는 길을 보는
안목을 갖지못하고 편협한 자기확신에 빠져 로마의 창조적 영웅 하나를 잃게했다.
영어로 <The ides of March>, 라틴어로 <Idus Martiae>, 이탈리아어로 <Idi di marzo> 즉 <3월 15일>하면
서구인들 간에는 <카에사르 암살 일>이라는 것이 설명 할 필요없는 상식으로 통한다.
이탈리아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3월 15일>을 <<懷古主義者들의 자가도취가 가져온 백해 무익한 비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로마의 내전도 브루투스이 죽음까지는 정치투쟁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공하정을 남기느냐, 아니면 君主統治 체제로 하느냐의 로마 국체를 둘러싼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권력투쟁으로 변모한다.
정치투쟁에서 이긴 군주정 내부에서 누가 군주의 자리에 앉느냐를 결정하는 투쟁이다.
살생부에 의한 철저한 복수전과 마지막 필리피會戰의 승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은 共和主義자 일소에 성공하고 필리피회전 이후 東과 西로 갈린다.
카에사르의 유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목된 것 말고는 나이나 경력 등 여러모로 안토니우스에 미치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원하는대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파르티아(페르시아)遠征이라는 카에사르의 유업이 남아있고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동방을 안토니우스가, 스페인 문다會戰 이후 폼페이우스 차남 세크토우스의 잔여세력이 남아 있을뿐 아니라 아직 미개한 서방을 옥타비아누스가 맡았다.
그러나 본국 로마가 서방에 속했다.
군사적 재능에서는 앞서지만 정치 안목은 어두운 안토니우스의 제안을 옥타비아누스는 내심 환영했는지 모른다. 로마 본국이 속하는 서방이 양질의 軍團兵 모집에 있어서도 시민권자들이 많기때문에 단연 우월했다.
만일 동 서가 충돌한다고 해도 동방의 量에 대해서 서방의 質의 대결이 된다.
여기까지는 안토니우스로서는 생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피리피회전의 승리 이후의 클레오파트라가 아니더라도 로마세계 부동의 제1인자는 안토니우스 자신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나이 40의 원기 왕성하고 검투사 같은 건장한 체력에 병을 모르는 안토니우스로서는 병약한 옥타비아누스를 난제들이 많은 서방에 몰아넣고, 동방의 부를 향수하면서 그가 소모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카에사르의 후계자를 최종적으로 걸르는 투쟁은 필리피의 평원에서 브루투스의 시체가 불에 타 소멸됨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었다.
안토니우스측은 절대 자신과 함께,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로서는 당면 목적이었던 복수 뒤에 오는 그의 기량이 시험대에 오른 제2단계의 시작으로서......
동방으로 향한 안토니우스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도 국가도 없었다.
동방의 제후들은 언제나 승자를 따른다.
이것이 경제력에서 우월하지만 군사력에서는 로마의 적이 아닌 동방 사람들의 연명책이었다.
파르살루스회전 후는 카에사르에 쏠렸고 필리피회전 후는 안토니우스 앞에 엎드린 것이다.
덕분에 칼 한 번 뽑지않고 승리의 행군을 이어간 안토니우스는 소아시아 동남부에 위치한 타르소스에 일단 주둔하고 거기서 이집트女王 클레오트라를 불러낸다.
이것이 안토니우스가 필리피 승리 이후 자멸의 길로 걸아가는 단초가 되는 것인줄이야 몰랐지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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