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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우라큠攻防戰
안토니우스 인솔 하의 제2진이 그리스에 도착한 것은 카에사르의 제1진이 그리스 서안의 오리쿰에 상륙한 날로부터 무려 80일 후의 3월 하순이었다. 폼페이우스해군의 방해작전과 겨울 난바다 때문에 지연된 것이다.
아드리아海의 풍랑때문에 카에사르가 지정한 상륙지점 아폴로니아로부터 직선거리 130킬로 이상 북쪽에 상륙한 안토니우스의 제2진과 제1진은 敵地에서 4월 3일에야 어렵게합류에 성공했다.
카에사르군의 총병력은 1 2진 합류로 중장보병 2만 5천, 경보병 수 미상에 갈리아와 게르만족으로 편성된 기병단이 1천 3백기였다.
여기에 대해 폼페이우스군은 중장보병만도 6만 6천에 달하고 경보병이 4천 2백 그리고 기병이 7천기였다.
공방전이 전개되는 도우라큠은 지금은 알바니아 땅이지만 당시 그리스북부 서해안 항구도시로 폼페이우스군의 보급기지였다.
여기서 후대가 새겨야 할 것은 카에사르의 전략이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를 포위하는 전략이다.
적지에서 보급이 거의 전무하다싶이한 카에사르는 속전속결 전략을 구사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다수의 병력이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지만 적을 기아전술로 일관하겠다는 폼페이우스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이 또한 카에사르의 전략이기도 했다.
폼페이우스가 포위작전을 방관만 할 수없을 것이라는 것이 카에사르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카에사르가 아드리아해를 향해 내륙쪽에 25.5킬로 거리의 장대한 포위망을 구축한데 대응해 폼페이우스는 바다를 배경으로하여 카에사르의 포위망에 맞서 22킬로의 짧은 방어망을 구축했다.
자연 카에사르측은 소수병력에 의한 긴 방어망임으로 병력배치가 산만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상대측은 다수병력으로 짧은 방어망이므로 자연 밀집대형일 수밖에 없었다.
양측이 포진한 가운데 소규모의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카에사르측에 결정적 사고가 발생했다.
갈리아戰 당시부터 카에사르의 총애를 받던 게르만족 기병 두명이 동료 기병들에 횡포를 부림으로써 피해 기병들의 고발로 카에사르로부터 질책을 받고 후사가 두려워 진지를 이탈, 폼페이우스측에 도주한 것이다.
두 이탈자에 의해 카에사르측 남쪽 끝 포위망이 허술하다는 제보를 받은 폼페이우스측이 맹공을 집중해 왔다.
소수병력에 의한 다수의 포위작전은 무리라는 것이 노출된 것이다.
카에사르측의 병력 250이 백배의 적의 공격에 4시간을 버텼고, 4시간 뒤에 스쯔라 인솔의 2개군단 5천 병력이 도착하여 간신히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취약지점을 담당한 제9군단을 중심으로 필사 방어를 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보하지 못하고 소수의 희생자만 내고 카에사르군은 포위망을 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도우라큠 근처 3개소와 포위선 3개소, 여섯 곳에서 동시 공격에 나온 폼페이우스측이었으나 전 전선에서 카이사르군 중장보병 750 대 폼페이우스측의 1개군단 6천이 벌인 격전이었다.
일단 적을 격퇴시킨 카에사르측 전사자는 200명이 안되었고 부상사가 많았다.
반면 공격해온 폼페이우스측은 이날 하루만도 약 2천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고말았다.
이 전투에서 기본전투단위의 百人隊長 4명이 한쪽 눈을 잃었고 백인대장 세바의 어깨에는 120개의 화살 구멍이 났다. 전투장 한곳에서 수거한 적의 화살만도 무려 3만개에 달했다.
BC.48년 7월 6일 양대 名將 간에 최초 벌어진 도우라큠攻防戰이었다.
이 전투의 승장은 분명히 폼페이우스였다. 카에사르의 포위작전은 실패로 끝났기때문이다.
카에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패배를 모르는 武將은 아니다.
실패는 하지만 반드시 만회한다.
BC.51년 갈리아(현 프랑스)의 제르고비아 철퇴 후 8년전쟁을 마무리지은 알레시아(Alesia)요새의 승리(본고 전편 로마史Digest-74-)가 말 해주듯이 카에사르는 실패는 하더라도 즉각 만회한다.
포위망을 푼 카에사르는 일단은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안전지대로 본 지점까지 철수한 카에사르는 전군 앞에서 훈시했다.
우선 오늘 일을 냉전하게 받아들이고 필요이상 심각히 생각하거나 공포에 떨 이유는 없다고 전재한 뒤,
<우리는 제신과 운에 감사해야한다.
이탈리아는 손실없이 손에 넣었다.
스페인에서도 유능한 지휘관들에 의해 적군을 최소한의 손실로 항복시켰다.
그리스 땅의 마케도니아 데사리아 아에토리아 각도시도 우리편에 서있다.
아드리아해도 한 명의 손실없이 무사히 건너왔다.
그러므로 운명이 모두 우리가 바라는대로 도움의 손길을 뻗혀주었다.>
고 한데까지는 좋은데 다음이 일반상식인의 귀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카에사르는 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불운의 책임은 다른 모든 것에 돌릴 수는 있을지라도 나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
나는 전투에 유리한 지세를 제군에 주었고 적측의 많은 요새까지 함락시켜 지금까지의 전투에서도 이겨 전황이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배려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눈 앞에 다가온 승리를 노친 요인은 재군의 혼란과 오인 그리고 우발적 사건에의 대처가 잘못된데에 있다. 만약 제군이 전력을 다했더라면 이 현상을 역전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이런 생각이 일치했더라면 제르고비아철수(3년 전 갈리아戰)와 같이 패배는 승리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에 질려 싸우지 않았던 자들도 스스로 전선에 돌진해 가는 기개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보통 사령관이라면 패배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했지 부하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 나폴레옹의 지적을 기다릴 것도 없이 도우라큠包圍전 자체가 전략자체의 잘못이 아니었나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을 정직하게 병사들에 사과했더라면 카에사르도 후세에 책임전가에 대한 비난을 들을 일도 없고 인간으로서 미련없이 깨끗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시점에서 최우선과제는 패배를 겪은 軍의 再建이었지 카에사르 개인의 후회 없는 정직함을 밝히는 일이 아니었다. 웅대한 꿈을 안은 카에사르의 그릇의 크기가 얼마인지를 아무도 알리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오늘 포퓰리즘 일색의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을 한번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기가 죽었을 때 네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면 당장 그래 맞아 내 책임이 아냐 하고 자기책임으로부터 도망쳐 버린다. 그렇게되면 재기에 필요한 에너지의 자가생산이 어려워진다.
카에사르는 이것을 피하고싶었던 것이다.
책임은 너희들에게 있다고 말함으로써 병사들의 차책감을 유발하여 분발력을 자극했던 것이다.
실제로 최고사령관의 훈시가 끝난 뒤 병사들의 가슴에 찬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전원이 애석의 눈물을 흘리고 패배에 앞장 섰던 제9군단 병사들이 누구보다 가슴아팠다.
그들은 8개월 전 이탈리아 본토 북부의 피아첸짜에서 從軍拒否(내심은 급료인상 요구) 스트라이크를 벌였으나 카에사르의 연설 한마디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 나머지 한 명 낙오자 없이 전원 그리스 원정에 참전한 카에사르의 핵심군단이다.
그 군단 병사들은 훈시를 듣고 과거의 경솔을 뉘우쳤을뿐만 아니라 이번 패배에 대한 벌로 10분의 1형(무작위 추첨으로 10명에 1명꼴로 뽑아 동료들이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벌)을 내려달라고 최고사령관에 탄원했다.
그러나 카에사르는 이를 거절하고 그날 軍旗를 버리고 도망한 기수 몇 명을 강등시키는 것으로 끝냈다. 기수가 전장서 위험에 처하면 군기는 동료 아무에게라도 인계해야한다. 기수는 戰線을 절대 버려서는 안된다.
도우라큠포위전 실패 후 카에사르는 전군을 데리고 남진하여 이번에는 결전의 會戰場을 물색한다.
BC.48년 7월 6일 도우라큠 을 철수하여 남쪽 아폴로니아에서 자시 잠시 휴식한 카에사르는 29일 그리스 중부 내륙 퍼얼사르스에 도착, 사방 20킬로의 넓은 평원에서 폼페이우스군과 회심의 大會戰을 펼칠 계획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