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 제국편-27-
*이탈리아 전역에 숙청의 회오리가 불고, 키케로는 목과 오른 팔까지 잘렸다.

Cicero's death (France, 15th century (BC.43년 12월 7일. 키케로의 처형 장면을 재현한 15세기 그림)
카에사르 암삼에 관련된 2천 3백명의 처벌자 명부에 누구도 아닌 키케로가 필두에 올랐다.
자기를 타도하기 위해 십 여차례나 집요하게 탄핵연설로 괴롭혀온 키케로에 대한 안토니우스의 분노의 화살이었다.
종전까지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거듭 보냈던 옥타비아누스도 그의 구명 노력은커녕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고 찬동했다고 한다.
키케로의 죄상은 카에사르 암살의 사상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카에사르 암살 전후에 키케로와 브루투스 이하 공범들과의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그의 죄상도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상을 벌한다면 형법상 문제는 되겠지만 三頭政治가 <살생부>라는 형태로 강행한 반대세력 일소작업은 是非야 어떻든 형사문제가 아니라 정치문제였던 것이다.
BC.43년 겨울 동안 로마도 이탈리아반도도 숙청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이또한 스쯔라를 본받아 현상금을 걸고 처벌자들 색출에 밀고자들을 독려했다.
40년 전 스쯔라식 공포정치의 재현이다.
살생부에 오른 것만으로 당사자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兒女子까지도 남편이나 아버지의 숨은 곳을 대라는 고문에 시달렸다.
사형에 처해질 백 30명 명단에 오른 자이면 연행 수고까지 할 필요없이 체포 현장에서 처형되어 잘린 머리만 로마에 보재져 로마포럼의 연단에 梟首되는 스쯔라시대의 재판이었던 것이다.
복수는 철저해서 처벌자 추궁은 가령 친족이라해도 용서 없었다.
三頭의 한 사람인 레피도우스의 친동생 파우루스 에밀리우스 레피도우스도 그리고
안토니우스에게는 이모부가 되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에사르도 사형자 명단에 올라
있어 처형은 여지없었다.
카에사르와 폼페이우스의 항쟁이 一門 一族의 이해 관계의 다툼이 아니라 국가 로마의 政體를 둘러싼 정치항쟁였기 때문에 육친 간의 정치사상적 분렬은 불가피했다.
카에사르는 이 되풀이되는 복수의 인간적 怨念을 피하기 위해 勝者도 敗者도 없는 관용의 세계를 폈던 것이다.
그러나 카에사르의 후계자들은 카에사르의 암살을 경험하고 있다.
숨은 패자들까지 찾아내 말살하지 않고서는 안심 할 수없었다.
三頭政에 의한 살생부 발표는 BC.43년 11월 28일이었다.
그러나 이날 2천 3백명 전원의 명단이 발표된 것은 아니다.
카에사르 암살에 직접 손을 댄 것으로 알려진 브루투스 이하 14인과 키케로 형제를
더한 제1진 16명뿐이었다. 거기 필두에 행동대 주동 브루투스나 카시우스를 제쳐놓고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가 올랐다.
당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잡은데 절망하고 로마를 떠나 여덟개나 가지고 있던 변방의 별장을 전전하며 브루투스가 있는 그리스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 우유부단한 키케로는 필요 물건을 가지려 다른 별장에 간 동생 퀸토우스를 혼자 버려두고 차마 떠나지못했다. 생애 마지막 날을 앞두고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탐색대의 접근을 알고도 하인들의 저항을 만류한채 운명의 순간을 앉아 기다렸다.
조용히 죽음을 맞은 키케로는 목이 잘리고 안토니우스의 명령으로 오른팔까지 잘려 로마로 보내져 로마포럼에 효수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자기를 향한 필리피케(Philippics)註)탄핵 연설문을 쓴 오른팔에 때해서도 단죄하지 않고는 못배겼던 것이다.
카에사르 암살에 환호했던 날로부터 1년 9개월이 지나는 BC.43년 12월 7일이었다.
63세의 죽음이었다.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닌 어느날 파라티노언덕 위의 황제궁전의 어느 방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손주들이 머리를 맞대고 키케로의 책을 읽고 있는 곳에
노 황제가 들어갔다.
소년들도 키케로 살해에 조부가 관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야단 맞을까
겁이 나서 긴장했다.
그러나 늙은 아우구스투스는 손주들이 읽고있는 책을 손에 받아들고 선채로 두루말이를 펼쳐서 잠시 읽은 뒤에 책을 손주들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교양은 있는 사람이었다. 교양 있고 나라를 깊이 사랑한 삼이기도했다.>
과거 한때 그로부터 어린애 취급을 받아서 불쾌하기도 했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한참 눈을 감고 지난 날을 회상 했다.
그리고 키케로의 名著 <의무에 대하여>(On obligations)의 한구절을 읽었다.
<모든 人間愛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고 큰 기쁨을 주는 것은 祖國에 대한 사랑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은 두 말없이 당연하고 자식들, 친족형제들 그리고
벗들의 사랑도 정이 담긴 사랑이기는 마찬가지로 인간에 있어 매우 소중한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랑도 조국애에 함축되어 녹아드는 것이다.
조국이 필요하다고 한다며는, 그리고 그것을 위해 너에게 일어서 주기를 바란다며는
조국에 한 목숨 바치는데 주저할 시민은 없을 것이다.>
카에사르의 <갈리아전기> <내란기>와 더불어 라틴어 文章讀本으로 쓰이는
키케로 <서간집> 중 특히 <의무에 대하여>는 이탈리아人의 국민교본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국가 로마를 사랑하는데에는 키케로도 카에사르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국가의 개념이 달랐을 뿐이다.
카에사르의 조국애가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를 아우르는
광역의 로마제국이라는 이상에 둔 것이라면 키케로는 조족애를 루비콩강 이남의 반도내 협의의 로마공화국이라는 현실에 국한시켜 본 차이였을 것이다.
결국은 조국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현실에 집착한 그의 인식능력이 변화의 보이지
않는 트랜드를 읽지못하는, 카에사르 말대로 보고싶은 현실만 보는 인간의 한계를
넘지못한 키케로였다. -계속-
註)
쇠퇴기에 든 그리스의 폴리스(도시국가)군의 통합을 시도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를 탄핵하고, 자유만이 시민이 지켜야할 최고의 가치라고하는 아테네시민에 호소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의 제목이 필리피케(Philippics)었던 것에서 키케로가 교묘히 인용한 것이다. 필리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로 당시 마케도니아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