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훈
로마史Digest-26-
*은인자중 1년 9개월을 참고 기다린 19세 청년執政官, 카에사르 2世는 칼을 뽑았다
카에사르가 요구한 서약에 서명을 하고서도 그것을 깨고 카에사르를 살해한 자 전원을 유죄로해서 추방형을 내린 페디우스法은 19세 나이의 옥타비아누스가 집정관에 취임해서 이룬 두번째 작품이다.
공식 카에사르의 아들이 된 그가 실로 1년 9개월을 칼을 갈며 참고 견디어온 한의 세월을 뒤로하고 복수를 다지는 진군나팔 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10월, 집정관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11개 군단으로 증강된 軍勢를 이끌고 아그리파와 함께 北伊屬州로 향한다.
이때까지도 젊은 집정관에 일루의 희망을 걸지 않을 수없던 키케로의 순진함에 실망을 해야 할지..... 63세의 이 노인에게 조언을 바라는 편지를 올리는 것을 잊지않음으로써 그를 기고만장케한 19세의 위선을 칭찬해야 할지.....
키케로는 北伊로 향하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타도해 줄것을 여전히 기대했다.
게다가 페디우스법도 암살자들을 단지 추방하는 것이지 사형을 선고한 것은 아니기에.
그라나 <복수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나팔을 불기까지 1년 이상도 참을 줄알았던 옥타비아누스였다.
그 19세의 젊은 집정관은 안투니우스와 대결 할 뜻이 없었다.
아니, 안토니우스는 대결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BC.43년 11월,북이속주 내의 작은 도시 볼로냐Bologna에서 갈리아와 스페인속주
총독들까지 합세한 카에사르파의 재회동이 실현되었다.
안토니우스, 레피도우스, 옥타비아누스 3인에 의한 史上 두번째 <三頭政治>라 불리는 共鬪體制가 성립된 것이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에 걸었던 키케로의 희망도 산산 조각 나는 새로운 사태의 발전이었다.
보로냐에서 3두 함께 군세를 몰고 수도 로마로 진군했다.
그리고 11월 27일에는 市民集會가 삼두정체를 5년 기한으로 국가로마의 危機管理체제로 한다고 공식 승인한다.
키케로가 믿고, 브루투스 등이 암살까지 강행해서 지키려고 애쓴 원로원 주도에 의한 共和政體, 즉 로마 독자의 과두정체는 이것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리고 <제2차 삼두정치>의 성립은 39세의 안토니우스가 죽은 카에사르의 사실상의 후계자가 되려던 야심을 잠시일지라도 접을 수밖에 없이되었다.
19세 젊은이의 힘은 이미 무시할 수없을만큼 강해져 있었다.
그렇치만 17년 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에사르 3인에 의한 제1차 삼두정체와 비교하여 안토니우스가 최강의 폼페이우스에 비유된다면 옥타비아누스는 나이로나 실적으로나 역시 가장 약세였던 당시 카에사르의 입지와 다를바 없었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사실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르지만, 생전의 카에사르가 말해오던
<사람은 보고싶은 현실만 보는> 그런 인간이었는지 모른다.
삼두정체를 확립한다는 데에 일치한 후에도 안토니우스의 입에서는 가끔 <옥타비아누스의 힘? 그건 죽은 카에사르의 이름을 등에 업은 것밖에....>하고 얕보았다.
제2차 3두정치는 당면과제로 다음 두가지에 완전 일치하고 있었다.
하나, <처벌자 명부>를 작성하여 반대세력을 괴멸시킨다.
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공동으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한다. 그 동안 레피도우스는 본국에 머물며 배후를 지킨다.
敵이던 사람까지도 용서한 카에사르의 寬容(Clemency)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를 잊을 수없었음일까. 안토니우스도 옥타비아누스도 어차피 안토니우스이고 옥타비아누스이지 카에사르는 아니었던 것이다.
악명 높은 그리고 생전의 카에사르가 거부해온 스쯔라식 恐怖政治의 부활이었다.
처벌자 명부 작성 때 누구보다도 옥타비아누스가 피도 눈물도 없는 희생자 선발에
앞장 섰다고 한다.
관용은 복수로 바뀐 것이다.
처벌자 명부에는 3백명의 원로원 의원과 2천명에 달하는 기사계급(경제인)의 사람들이 나열되었다.
그 중 백 3십명은 국가의 적인 국적으로 판정해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을 애초 폼페이우스측에 붙었다가 카에사르의 관용으로 용서되어 이전과 같이 원로원 의석을 유지해오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카에사르 암살에 직접 관여한 자도 있으나 대부분은 칼을 휘둘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암살자들을 몰래 도와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2차 3두정은 40년 전의 스쯔라를 배와 반대세력을 발본한다는데 일치했던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2천명의 처벌자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역시 근본적 자산 몰수였다.
그 배경에는 擧事에 필수자금 조달의 목적도 있었다.
결과는, 잊어서는 안될 천년 帝國을 다진 로마 역사의 한 대목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뼈아픈 역사를 겪지 않았다면 천년로마사가 존재했겠나 생각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2천년 후, 지난 세월 악성좌익정권에, 대내오의 적들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우리가 역사의 교훈으로 배와야할지 말아야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계 속-